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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이별, 그리움, 그리고 재회의 기쁨에 대하여

by 샬롬♡예루살렘 2013. 11. 26.

 

 

 

 

최근 헤븐 크리스찬 센터는 축제의 분위기로 북적거리고 있습니다. 희년이 온 것 같다는 말이 들리기도 합니다. 한동안 보이지 않았던 많은 사람들이 최근 들어 많이들 돌아왔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축제분위기 속에서 이들을 환영하면서 서로 포옹하고 울고 웃으며 즐거운 해후를 나누고 있습니다.

 

노란 풍선을 들고 축하환영을 하기도 하며, 오랜 만에 만난 사람들끼리 포옹하고 우느라 눈이 부어서 붕어가 되기도 하며, 하이파이브와 박수로 환호성과 기쁨의 소리가 가득해지기도 합니다. 이 즐거운 소식들에 대해서 조금 이야기를 나누어보겠습니다.

작년 초에 갑자기 목회사역을 시작하게 되었을 때, 처음에 사역을 어떻게, 어떤 방향으로 시작해야할지, 잘 감이 잡히지 않았습니다.

 

이제야 주님의 섬세하신 인도하심에 대해서, 의도에 대해서.. 조금씩 의도를 느끼고 있는 편이지만, 처음에는 그 동안 오랜 시간동안 목회는 이제 끝났다고 여겼고, 체력이나 영력이나 모든 면에서 사역을 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기 때문에 모든 것이 당황스러웠고 어디로 가야할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다만, 한 가지 방향이 있다면, 그것은 주님이 진정 주인 되시는 교회사역을 하고 싶다는 마음뿐이었습니다. 교회의 주인은 오직 주님이십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교회는 만물을 충만케하시는 분의 충만입니다.

 

사역자가 주인이 되는 교회를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성도가 주인이 되는 교회를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다만, 주님이 진정 주인되시고, 주님의 의도, 주님의 원하시는 것이 중심이 되며 주님을 귀하게 여기는 이들이 모이는 교회, 그러한 사역을 하고 싶었습니다.

 

사역자는 교회의 주인이 아닙니다. 대형교회의 사역자들은 흔히 많은 권위를 가지고 군림하고 있는 경향이 있지만, 그것은 교회의 바람직한 모습은 아닙니다. 또한 성도가 교회의 주인이 되고 사역자가 성도들의 눈치를 보는 것도 역시 바람직한 것이 아닙니다. 교회의 주인은 오직 주님이십니다.

교회란 근본적으로 땅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교회는 사람을 위하여 존재하지 않습니다. 사람의 욕망, 땅의 욕망, 세상의 욕망, 자아실현을 위해서 존재하지 않습니다. 교회는 주님을 위하여 존재합니다. 하늘을 위하여 존재합니다. 영혼이 깨어나고, 거듭나서 하늘의 생명에 대해서 배우고 경험하며 누리는 곳입니다.

 

이를 위해서 가장 기본적으로, 교회는 주님을 사모하고 구원을 갈망하는 이들이 모이는 곳이어야 합니다. 나는 모태신앙으로 어릴 적부터 교회에 나갔지만, 교회에서 복음에 대해서, 예수에 대해서 별로 배운 기억이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항상 모여서 세상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고, 자기 자랑에 대해서 나누었습니다. 누군가를 험담하거나 자신의 억울함에 대해서 열심히 나누곤 했습니다. 거기에서 예수에 대한, 진리에 대한 열망을 찾기는 어려웠습니다.

 

나는 이러한 사역이 아닌, 주를 갈망하고 사모하는 이들이 모이는 교회사역을 하고 싶었습니다. 그저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나눈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만나서 주님의 이야기를 하고 서로의 영적 성장에 대해서 관심을 기울이고 나누는.. 그러한 교회를 하고 싶었습니다. 그저 단순히 교회 간판을 걸고 사람들이 습관적으로 일주일에 한번 앉아 있다가 돌아가는.. 그러한 사역을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아무나 오게 식의 교회사역을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소비자는 왕이라는 식으로, 사람들을 끌어 모으기 위해서 온갖 세상의 방법을 도입하는 사역을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교회에서 영어를 가르치고 문화센터를, 스포츠센터를 운영하고 여러 선물들을 주면서 사람을 모이게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나는 갈망이 없는 사람들이 모이는 교회를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나는 교회에서는 주님의 아름다우심을, 복음을 전달하고 설명하는 것으로 충분하며, 영혼의 굶주림을 가지고 있는 이들이 교회에 온다면, 그들은 그것으로 충족될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애당초 교회의 외적 성장은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니었고, 부르심 받은 것도 아니었습니다. 나는 사람들이 많이 몰려오고, 교회가 커지는 데에는 아무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것을 위해서 기도해본 적도 없었습니다. 나는 단순히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하고 그분을 알아가는 것을 원했습니다. 예수를 알아가는 이들이 증가된다면, 그리하여 삶에서 예수의 향기와 능력이 가득하게 충만하게 나타나게 된다면, 그것은 부흥일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오기가 쉽지 않도록, 나는 교회에 간판을 걸지 않았습니다. 십자가도 세우지 않았습니다. 외부에서 보면 교회 이름도 없고 십자가도 없으니 우리의 모이는 장소가 교회인줄 알 수가 없었습니다.

나의 책을 읽은 독자나, 이 카페에 오는 사람들만이 우리 교회의 위치를 알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일부러 교회에 찾아오기 어렵게 한 것은, 주님에 대한 갈망이 없이 교회를 다니며 신앙생활을 하는 이들에게 지쳤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만족, 자아의 만족을 구하는 이들은 많이 있습니다. 그들은 아직 교회에 올 때가 아닙니다. 그들은 진리에 대해서, 복음에 대해서 배고플 때까지 좀 더 시간이 필요합니다. 배고프지 않은 이들은 아직 산해진미를 소화할 수 없습니다. 거듭남의 진리, 구원의 진리는 값을 측정할 수 없는 보화입니다. 그러나 그 보화를 얻기 위해서는 먼저 굶주려야 합니다.

모태신앙과 같은, 주님과의 개인적인 만남이 없이 단순히 종교생활 비슷하게 오래 동안 형식적이고 습관적으로 신앙생활을 하던 이들은 그 영혼의 미래가 안전하지 않습니다. 나는 배고프지 않고 단순히 습관을 좇아서 예배에 오는 신자들로 채워지는, 그러한 교회사역을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주님은 십자가에서 심장을 찢으며, 절규하시면서 그의 사랑을 표현하고 죽으셨는데, 그 복음의 메시지를 우아하고 교양있게 전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복음이란 미치는 것이며, 사로잡히는 것입니다. 어차피 예수에 미치지 않으면 사람들은 다른 것에 미치게 됩니다. 바른 선명한 복음에 접하게 되면 누구나 사로잡히고 미치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시체들은 다 누워있지만, 생명이 들어가면 그것은 움직이고 뛰어다니게 됩니다.

 

 

나는 기존의 많은 교회들이 복음을 별로 전하지 않고 단순히 사람들을 교회로 데리고 오는 것에 집중했기 때문에 교회 안에 많은 불신자가 있으며 갈망이 없는 신자들이 많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심지어 사역자들 중에도 아직 거듭남이나 주님과의 관계가 분명하지 않은 이들이 많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당연히, 주님께 대한 갈망을.. 굶주림을 일으킬 수 없을 것입니다.

 

많은 사역들이, 사역자들이.. 복음의 가치를, 주님의 가치를 너무나 낮추었습니다. 그래서 적지 않는 신자들이 주님을 가벼이 여기며, 자기의 욕망을 채워주고 들어주는 존재로만 생각합니다.

주님을 사모하고 경배하기 위하여 교회에 오는 이들이 그리 많지 않은데, 그러한 삶.. 그러한 신앙에서는 결코 행복과 기쁨을 누릴 수가 없습니다. 사람은 주를 위하여, 그분을 섬기고 경배하기 위하여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자기가 인생의 주인이 되어서는 결코 행복할 수 없으며 오히려 마귀의 종이 되어 많은 고통과 슬픔의 삶을 살게 될 뿐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복음을 전하고 예수를 전해서 사람들을 진정한 기쁨, 천국의 영광을 경험하게 하는 것에 관심이 있지, 단순히 사람들이 원하는 것, 그들의 욕망을 채워주고 도와주는 데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습니다.

우리는 각자가 교회입니다. 신약에서 교회란 건물이 아니라, 주님을 구주와 주님으로 고백하는 무리들 자체가 교회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의 모임, 단체가 곧 교회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구성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주를 사모하느냐, 진리를 갈망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남녀노소, 외적인 지위나 상태와 상관없이 주를 사모하고 갈망하면 교회에 와서 한 일원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면 오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이 부분을 나는 가장 중시하였습니다. 주님을 사랑하고 경외한다는 것.. 이 하나의 기초 위에서 우리는 서로 교제하고 예배를 나누며 사랑하고 같이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교회는 아무나 올 수 있지만, 사모하지 않는 이들은 아직 올 때가 아닙니다. 그래서 나는 사람들이 함부로 교회에 오는 것에 대해서 몇 가지의 제한을 두었습니다.

 

 

첫째로, 교회에 오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지만, 강요에 의해서 오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본인이 원하지 않는데 가족들의 강요에 의해서, 억지로 오게 된다면, 그것은 좋은 일이 아닙니다. 그러한 방식으로는 아름다운 열매를 맺기 어렵습니다.

 

주님의 은혜를 경험한 어린 신자들이 하는 흔한 실수가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위하여, 자신의 방법, 자신의 열심히 하는 것입니다. 은혜를 입고 너무 기쁘고 감격한 나머지, 자신이 경험한 이 은혜, 이 행복을 다른 이들과도 나누고 싶은데, 그러한 사역에 있어서 주님의 인도하심이나 영적인 원리를 통하지 않고 자기 나름의 방법으로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주의 역사를 방해합니다.

 

[세상에, 이렇게 좋은 말씀을 나 혼자 듣고 있어야 하나? 아니, 이렇게 딱 맞는 이야기에 왜 공감하지 않는 거지?]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이들이 의외로 많이 있습니다. 자기의 생각과 다른 이들의 생각이 같으며, 자신이 공감하고 있는 것이면 다른 이들도 공감할 것이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이런 생각이 옳다면 세상에 그 많은 전쟁들, 오해들, 증오들, 이혼, 파괴가 있지 않을 것입니다.

 

 

모든 사람은 다릅니다. 생각이 다르고 느낌이 다르고 상태가 다르고 기질이 다르고 입장이나 위치나 가치관, 철학이 다릅니다. 문제는 나만 옳고 다른 이들은 다 틀렸다고 믿는 이들은 평생을 고행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사람의 마음을 전혀 모르는 것입니다.

우리는 영적으로 어린 신자들이 얼마나 주의 사역을 방해하는 지 이해해야 합니다. 가만히 있으면 구원에 훨씬 더 가깝고, 주님이 역사하실 수 있는 것을, 어린 신자들이 가족들을 들들 볶는 바람에 그 영혼이 주님께로 나아오지 못하는 경우는 아주 많습니다.

 

나는 이렇게 가족들에게 신앙을 권하려고 들들 볶다가 도무지 열매가 없어서 드디어 포기하고 나자, 오히려 그 후에 상대방이 관심을 갖게 되는 경우를 여러 번 접했습니다. 많은 경우에, 우리의 열심은 하나님의 역사를 방해하며 우리는 가만히 있는 것이 하나님을 도와주는 것일 때가 많이 있습니다. 발에 흙탕물을 묻히고 엄마의 청소를 도와주겠다는.. 기특하지만 난감한 어린 꼬마 같은 영혼이 우리 주변에는 아주 많이 있습니다.

 

 

사역에 있어서 가장 기본적인 것은 주님과 동행하는 것이며 주님의 인도와 음성을 아는 것이고 거기에 인간적인 것을 섞지 않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가나안의 사역입니다. 가나안 정복은 먼저 애굽에서 구원받고 출애굽하고, 광야에서 나의 모든 육적 성향이 주님께 굴복되고, 그리고 나서 비로소 실제적인 생명의 사역, 정복이 가능한 것입니다.

 

불행하게도 아직 애굽도 통과 못해서 거듭남, 구원의 확신이 없는 이들, 아직 광야의 기초도 통과하지 못한 이들이 열심히 사역을 하면서 얼마나 많은 영혼을 혼미함으로 이끄는지 모릅니다.

사역이란 많은 좋은 자료를 가지고 사용한다고 해서 실제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에게 이루어지지 않은 이론은 실제가 될 수 없으며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아무튼, 본인들이 원하지 않고, 아직 주님의 때로 이루어지지 않아서 갈망도 없는 상태에서 가족의 강요로 인하여 교회에 오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물론, 본인이 별로 갈망이 없기는 하지만 예배에 오는 것 자체를 싫어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괜찮습니다. 언젠가는 갈망이 생길 수도 있으니까요. 그러나 본인은 전혀 원하지 않는데 억지로 그러한 상태의 사람을 교회로 데리고 온다면, 그것은 영의 깨어남과 성장에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나는 이러한 영적 강요로 인하여 이혼과 같은 비극적인 결말이 있었던 사례들을 꽤 기억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주님의 때를 기다리지 않고 이스마엘을 낳았던 아브라함이 지금 얼마나 큰 대가를 지불하고 있는지 알 것입니다. 인간적 열정은 주님을 방해하며 평생에 걸쳐 많은 고통의 대가를 지불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교회에 사람들, 가족들을 데리고 오고 싶을 때 반드시 상대의 의사를 물어야 합니다. 다만 상대방의 행복과 기쁨을 원하는 것이며 원하지 않으면 거절할 수 있다고 반드시 부드럽게, 인격적으로 친절하게 대하여 확인을 해야 합니다. 제안을 거절한다고 어떤 불편함이나 불이익도 없으며 당신을 사랑하고 기다리지만, 싫다면 분명히 거절할 수 있다고 이야기해야 합니다.

천국에는 강요나 억압이 없습니다. 그러나 지옥에는 항상 유혹과 속임을 통하여 영혼을 사로잡고 강요합니다. 애굽에서는 바로의 채찍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격적인 분이십니다. 그분은 우리를 사랑하시지만 우리의 자유를 억압하시지 않습니다.

 

탕자의 아버지는 가슴을 찢으며 떠나간 아들을 기다리고 잠을 이루지 못했지만, 그러나 떠나려는 아들을 붙잡지 않았습니다. 가슴이 아프지만, 자유를 줍니다. 그리고 기도로 눈물로 기다립니다. 그것이 천국의 방식입니다.

이런 부분에 대해서 많이 이야기를 해서, 이제 헤븐 센터에는 강요로 인하여 교회에 오는 이들이 많지 않습니다. 처음에는 꽤 있었지만 이것에 대해서 반복적으로 가르쳐서, 이제 그렇게 온 가족들은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시간에 그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립니다. 그렇게 주님에 대하여 관심이 없는 이들이 교회에 오지 않고 갈망하는 이들만이 교회에 있다면, 교회에 임하시는 주님의 임재와 역사하심은 점점 더 아름답고 황홀하고 깊어집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점점 더 쉽게 주님의 임재와 교제에 나아가게 됩니다. 한 사람의 갈망과 헌신은 전체 공동체를 영적으로 깊게 하며, 한 사람의 무덤덤과 비헌신은 전체 공동체에 불편함과 부담을 줄 수 있습니다.

 

 

아직 준비되지 않은 가족들을 위해서는 말로 하지 말고 주님께 기도드려야 합니다. 그것이 그의 돌아오는 때를 앞당깁니다. 아내들은 남편에게 하나님 이야기를 많이 하지 말고, 하나님께 남편 이야기를 많이 하는 것이 좋습니다. 별로 기도하고 대가를 지불하지 않고 영적인 은혜가 흐르는 곳에 데려다놓기만 하면 될 것이라는 생각은 엄청난 오해입니다. 어떤 잔치가 있어도 배부른 이들은 음식을 먹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 배고픔은 사람이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화려한 음식, 정말 귀한 음식.. 이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음식을 먹는 사람의 위장 상태, 굶주림의 정도입니다. 일반적으로 전도를 하는 사람들이 복음 메시지, 능력에만 관심을 가지고 그것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의 흡수력, 상태를 이해하는 것은 부족한 면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더 중요합니다. 준비가 된 사람, 주린 사람은 아주 간단한 메시지를 통해서도, 아주 작은 권면이나 베풂을 통해서도 주님께 사로잡힐 수 있습니다.

배부른 사람이 음식을 통해서 없던 식욕이 갑자기 강력해지는 것이 가능할 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잘못된 음식은 그것이 가능합니다. 인스턴트 음식, 사람이 만들어내는 음식은 거대 기업들이 사람을 음식의 중독에 빠트리기 위해서 엄청난 연구와 비용과 노력을 쏟아붓기 때문에 햄버거나 콜라 같은 음식들에 중독이 되고 많은 비만인들이 생깁니다. 사람을 중독으로, 노예로 만들 때 기업은 많은 이득을 취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많은 기업들이 지옥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으며, 바로처럼 사람을 노예로 만드는데, 천국에 속한 사람이 천국적인 기업을 이룬다면, 그는 사람의 영혼을 섬기고 도우며 자신도 이익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지옥적인 기업이 더 많습니다. 이 시대의 기독교는 아주 피상적이며 주님의 주되심에 대한 부분이 부족하여 신앙과 삶이 별개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만들어내는 혼합적인 음식들은 중독을 일으킵니다. 그래서 거짓 식욕을 만들어냅니다. 그래서 피해자들을 파괴합니다. 사람들은 전혀 배고프지 않으면서도 중독적으로 음식을 먹게 됩니다. 그것을 거절할 수가 없습니다. 후회하면서, 울면서 사람들은 음식을 먹고 슬픔과 고통과 각종 질병에 노출됩니다. 사단은 항상 이런 식으로 거짓 욕망을 일으키고 비전, 꿈이라는 이름으로 야망을 만들어내서 영혼을 파괴하고 노략질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신 음식에는 중독이 없습니다. 자연적인 음식을 먹고 중독되는 사람은 없습니다. 다들 음료수나 아이스크림, 햄버거에 중독되고 필요 이상으로 먹지, 사과에 중독되고 감자에 중독되는 사람은 없습니다. 배가 고플 때, 필요한 만큼 먹을 뿐입니다 .

이와 같이 영적인 배고픔은 유도하고 조작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마귀는 유혹하고 조작하지만, 그래서 헛된 욕망으로 사람을 파괴하지만, 그러나 영적 배고픔은 사람이 조작하고 유도하여 만들어 낼 수 없습니다. 성령은 그렇게 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을 헌신시키고, 주님께로 인도하는 전도자, 사역자는 성령의 감동과 인도하심에 민감한 사람이어야 하며, 인간적인 방법과 지혜와 노력으로 사람들을 복음화시킬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시간을 길어지게 하며 그들이 돌아오는 시간을 멀어지게 합니다.

사람들은 헌신되지 않은 삶, 비신자의 삶이 마귀의 노예 생활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때가 되면, 중보자의 기도가 쌓이면, 그들은 자기들이 속아서 섬기고 있는 악령들, 세상의 신이 얼마나 잔인하고 삶을 황폐하게 만드는지 알게 될 것입니다.

 

바로 그 시점에서 비로소 영적 굶주림이 시작됩니다. 하나님을 향해서 나아오게 됩니다. 그때가 오기 전에 교회에 있는 것은 구원과 거듭남과 아무 상관이 없으며 그저 교양으로, 문화로 종교생활을 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그는 구원받은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는 가족이나 친지의 강압으로 인하여 예배에 와서 오랜 시간을 예배 고문을 당하는 이들을 안쓰럽게 생각합니다. 주님을 사모하고 영의 감각이 깨어나서 예배에 참석하는 이들이야 예배가 기쁨과 축복과 영광의 잔치이지만 전혀 아무 감동도 느낌도 없이 예배를 버티고 있어야할 그들을 보면 너무나 측은해 보이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러한 이들을 축복해서 돌려보냅니다.

그렇다고 불편한 방식으로 쫓아 보내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우리는 고통을 겪고 있는 그들에게 자유를 주는 것이며, 나중에 언제든지 예배에 오고 싶은 마음이 생기면 그 때 오라고 축복하고 보냅니다. 대부분의 경우 이들은 아주 기뻐하며 우리에서 해방된 동물처럼 자유롭게, 즐거운 마음으로 교회를 떠납니다.

 

그렇게 떠났다가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난 후에 지난 시절에 드렸던 예배의 순간들을 기억하며 은혜를 사모해서 돌아오는 경우도 꽤 있습니다. 그렇게 되는 것이 자연스러운 성장의 방식입니다. 강압은 결코 신앙심을 생기게 하지 못합니다. 의지적 동의를 통해서만 믿음은 자랄 수 있습니다.

물론 자신이 적극적으로 온 것은 아니며, 친지들의 권면을 통해서 왔더라도, 본인이 그리 헌신되거나 갈망하는 마음은 부족하다고 해도, 예배에 참석하는 것을 싫어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들을 억지로 보내지는 않습니다. 다만, 억지로 와서 고통스러워하는 사람들에게 자유를 주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둘째로, 본인이 원해서 교회에 나오더라도, 가족들이나 주위에서 헤븐 교회의 출석을 심하게 반대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때는 출석을 고려해보아야 합니다.

주위에서 교회 출석을 반대하는 데에는 다양한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물론 가족들이 교회 출석을 반대한다고 해서 신앙생활 자체를 중단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주위에서 신앙생활 자체를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헤븐 교회에 나가는 것을 반대하는 것이라면, 그것을 고려하는 것이 필요할 것입니다. 교회가 헤븐 교회만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가족들이 어떤 이유로 반대하는지, 그에 대한 고려를 해야 합니다. 

 

가정은 자기 혼자만의 것이 아닙니다. 다른 가족들도 있습니다. 그들이 믿는 사람이든, 믿지 않는 사람이든, 상대방의 인격과 의사를 존중해야 합니다. 일방적으로 끌려갈 필요는 없지만, 최대한 존중하는 길을 찾아야 합니다.

 

자신이 주님을 사랑하며 신앙에 열심을 내고 예배에 열심히 참여하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가족들이 그것을 기뻐하며 같은 신앙의 길을 가고 있다면 그것은 바로 작은 천국의 모습일 것입니다. 그러나 가족들 가운데 그러한 신앙적인 열심을 불편해하거나 싫어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러한 면에 있어서는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만약 신앙 자체를 반대하는 것이라면, 좀 더 근본적인 문제에 대해서 기도하면서 주님의 인도하심을 구해야 합니다. 그러나 가족들이 반대하는 이유가 신앙 자체의 본질적인 문제가 아니라면, 신자의 미숙한 태도나 이기적인 모습에 기인한 것이라면 거기에는 조율이 필요합니다.

 

 

가급적 신자는 가족 내의 불신자들과 좋은 관계를 맺어야 합니다. 진정한 신앙인이라면, 어느 정도 성숙한 신자라면, 거듭난 생명을 받았고 주님의 빛을 받은 성도라면 어느 정도 가치관의 변화가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는 섬김을 받는 것보다 섬기는 것을 좋아하며, 가족들에게 사랑과 친절과 향기의 모습을 보여줄 것이며 가족들을 존중하고 배려할 것입니다.

 

 

헤븐의 많은 신자들은 가족 내의 불신자들에게 변화를 인정받고 있습니다. 헤븐에 나오면서부터 삶과 태도와 많은 것들이 바뀌어졌다고, 행복해 보인다고 칭찬을 듣습니다. 전에 수시로 싸우던 사람이 거의 싸우지 않으며 절대로 사과할 줄을 모르던 사람이 쉽게 사과를 하고, 아이들에게 거칠게 말하던 이들이 따뜻하고 부드럽게 말한다고 아이들이 놀라곤 합니다.

 

남편을 마구 몰아세우던 사람이 남편 앞에 무릎을 꿇고 그동안의 삶에 대한 용서를 구하는 것은 헤븐에서는 흔한 일입니다. 그러한 변화들로 인하여 가족들은 헤븐에 오는 것을 대체로 인정해주고 찬성하는 편입니다. 남편은 헤븐에 오지 않고 있지만, 아내가 헤븐에 와서 많은 변화를 경험하고 가정의 분위기가 많이 좋아졌기 때문에 아내가 가끔 헤븐을 빠지게 되면 다시 아내가 전의 모습으로 돌아간다고, 오히려 남편이 헤븐의 출석을 독려하는 경우도 흔히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었습니다. 이것은 헤븐에 다니면서도, 헤븐의 메시지를 충분히 소화하고 적용하지 못하는 것에 기인하는 면이 있었습니다. 어떤 이들은 강요를 금하는 많은 가르침을 받으면서도 여전히 다른 가족들에게 신앙을 강요하곤 했습니다.

 

싫다는 이에게 과도한 신앙의 행위와 헌신을 요구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이러한 일로 인하여 가정이 아주 힘들어진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로 인하여 그러한 가정에서는 헤븐의 스타일이 광신을 요구하는 것으로 오해하기도 하였습니다. 이것은 전혀 헤븐스타일이 아닌데, 일부의 사람들은 열심이 지나쳐서 갈등이 빚어지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이러한 경우 나는 가급적 교회 출석을 일시적으로 중단하거나, 아니면 최대한 상대방의 동의를 구할 수 있도록 기도하고 대화하며 가족들과 좋은 관계를 가질 수 있도록 노력하도록 권하곤 했습니다. 이런 이유로 본인은 원하지만 가족과의 관계를 인하여 출석이 중단된 이들이 있었습니다.

 

모든 결정은 기도하는 중에 본인이 해야겠지만, 가급적이면 덕을 세우고 가족을 사랑하며 자신의 변화된 모습을 통하여 상대방에게 영적갈망까지는 아니더라도, 심각한 갈등 없이 교회 출석을 허락받을 수는 있는 상태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며 예배에 힘쓰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가정을 소홀히 하는 것은 곤란한 일입니다. 토요일이나 주일의 경우, 혼자서 교회에 나오며 많은 시간을 교회에서 보내는 이들은, 본인이야 행복하고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고 하더라도, 그것에 대해서 당당해서는 안 됩니다. 적어도 가족들에게는 자랑스러울 것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미안한 마음을 가져야하고, 자신이 마음껏 교회 활동을 할 수 있도록 가족들이 배려해준다면 감사하는 마음을 표현해야 하며, 자신도 시간의 문제에 대해서 적당히 양보하며 서로 좋은 관계를 맺어야합니다.

불편해하거나 부정적으로 보는 가족들이 있다면, 겸손하고 온유한 자세로 설득하는 것이 필요하며, 기도해야합니다. 여기에는 기도도 필요하고 존중과 설득도 필요합니다.

 

헤븐 성도의 경우, 내가 알기에는 대부분 가족들과 좋은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전에는 불편했던 관계가 좋아지고, 벽이 허물어지고 사랑과 고마움을 나누게 되었다는 고백들은 수도 없이 듣습니다. 그래서 성도의 변화된 모습보고 가족들이 신앙생활을 시작하거나 교회에 같이 나오게 된 경우도 많습니다. 그렇게 나중에 나오게 된 가족이 먼저 나오던 성도들보다 더 주님을 사랑하고 변화되어 가는 모습들도 꽤 있습니다.

 

그러나 가끔 어처구니없게도, 내가 가르치는 것과는 정반대로 다른 가족들에게 비인격적인 방식으로 신앙을 강요해서 결혼 생활에 어려움을 겪는 이야기를 듣기도 합니다. 헤븐의 메시지를 좀 더 잘 이해하고 적용했더라면, 그런 일은 없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가정의 불화나 문제들은 대부분 악한 것이라기보다는 지혜와 융통성의 부족에서 일어납니다. 사람의 마음에 대해서, 상대에 대해서 충분히 존중하고 이해한다면, 서로가 행복할 수 있는 길이 있을 것입니다. 상대방이 정 싫어하며 같이 있는 것을 거부한다면, 상대를 배려하는 면에서 그 의견을 들어줄 수 있지만, 가급적 주님께서는 평화 가운데서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우리는 교회에서는 입으로, 영으로 주님을 예배하지만 삶에서는 행함으로, 사랑으로, 섬김으로 주님을 예배합니다. 주일에 배운 예배의 삶을 가정에서, 직장에서, 학교에서 적용하도록 합니다. 직장 일도, 가정 일도.. 예배의 연장인 것입니다. 그것이 신자의 바람직한 삶이며, 불신자들이 우리를 통해서 살아계신 하나님을 보고 경험할 수 있는 길인 것입니다.

 

 

셋째로, 가족 관계 외에도 교회에서 나가게 되는 일이 더러 있는데, 그것은 징계와 조언에 대한 문제일 것입니다. 교회의 사역에서 성도에게 잘못이 있을 때 그것에 대해서 조언하고 사안에 따라 징계가 있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그것은 교회가 병원의 의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정죄가 아니라, 치유를 위한 것입니다.

 

질서는 필요합니다. 교회라는 공동체에서 언행을 통해서 다른 이들에게 상처를 입혔을 경우, 거기에는 반성과 사과가 필요합니다. 이것은 공동체를 보호하고 양들을 보호하며, 본인 자신에게도 성장을 위하여 필요한 것입니다.

 

일반적인 교회에는 성도들끼리 돈 거래를 하는 사람들도 있고 분파를 만들어서 다른 이들을 험담하는 경우들도 있으며 기가 센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을 좌지우지하는 경우들이 흔히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일들은 헤븐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예를 들어서,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들에게 큰 소리로 화를 낸다거나 험담을 한다거나.. 하면, 그는 사과를 하지 않는 한 더 이상 같이 신앙생활을 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편안하게 이 곳에 운행하시고 주인노릇을 하셔야 하기 때문입니다.

 

헤븐에서는 모두가 서로를 존중해야 합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다른 이들을 비난하거나 공격한다면, 그러한 일들이 무사하게 지나가지 않습니다.

 

공개적으로 문제 있는 행동을 하였을 때는 공개적으로 사과를 해야 합니다. 몇 사람 앞에서 잘못을 했을 때에는 그들 당사자 앞에서 사과를 해야 합니다. 그러면 서로가 용서와 사랑을 고백하며 서로 포옹하고 사랑을 고백하게 됩니다. 일대일로 잘못이 있을 때는 상대방에게 사과해야 합니다.

 

이 모든 것은 사역자의 입회와 인도 아래서 합니다. 외부에 나타내지 않은 혼자서 마음속으로만 껄끄럽게 느껴지는 것이 있을 때는 혼자서 주님께 고백 드리면 됩니다. 

 

징계와 조언이 있을 때, 사역자는 결코 성도에게 화를 내거나 비인격적으로 대하지 않습니다. 사랑을 가지고 부드럽게 조목조목 이해시키며, 이것이 지금 굴욕으로 느껴질지라도, 잘못한 부분에 대해서 반성과 사죄를 해야 다른 이들에게도 좋고 자신의 영혼의 성장에도 좋으며 악한 영들에게 틈을 주지 않는다고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이것을 받아들이지 못해서 나가시는 이들이 더러 있습니다. 자존심을 내려놓는 것을 몹시 어려워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 때 그들의 선택을 존중하며, 나중에 다시 마음이 바뀌게 되면 연락을 달라고 말하고 그들을 축복하고 보냅니다.

 

그들이 떠난다고 해서 우리가 비난하거나 판단하거나 하는 일은 전혀 없습니다. 우리는 좋은 추억만을 간직합니다. 더러 불편하게 나가신 분들이 바깥에서 우리를 비난한다는 이야기를 듣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러한 이야기에 별로 신경을 쓰지 않으며 여전히 그들을 그리워합니다.

 

나가게 되는 네 번째의 경우는, 한 곳에 속하지 않고 여러 교회나 영적 단체에서 훈련을 받거나 속해있는 경우입니다.

우리는 결코 헤븐이 대단한 곳이라거나 다른 곳은 다 옳지 않다는 입장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모든 곳에는 주의 뜻과 부르심이 있습니다. 그리고 모든 이들은 자기의 부르심을 따라 하나의 신앙 형태를 결정하고 거기에 속하여 나아갈 자유가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의 형태에서 섞임이란 좋지 않습니다. 2-3 가지의 신앙 형태, 소속이 섞인 것은 성장에 있어서 문제가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가급적, 헤븐에 다니면서 다른 곳에도 동시에 적을 두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어떤 부딪침이나 경쟁이 있을 때, 항상 양보하는 쪽을 선택하기 때문에 그렇게 몇 군데에 소속하는 분들에게는 가급적 여기에 오지 말고 그곳에만 최선을 다해서 섬기라고 조언합니다. 그 쪽에서 자유함과 만족이 있으면 그것으로 충분하고 만약 자유함이나 열매가 부족하다면, 도저히 견디기가 힘들어서 다른 길을 찾아야 한다면 거기에서 벗어나서 찾아야 합니다. 어중간한 것은 곤란합니다. 양쪽에 속해 있다면 양쪽에 다 피해를 주게 됩니다.

 

 

이러한 방침에 대해서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어떤 기도회에 다니면서, 기도하는 일이 좋은 일인데 아무 데나 가면 어떠냐고 화를 내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단순하지 않습니다. 기도회라고 하더라도, 기도의 방향, 목적, 기도회에서 나타나는 현상, 영들, 이런 것들이 같지 않을 수 있습니다. 성경공부를 해도, 인도자의 해석, 방향, 목표에 따라 전혀 다를 수 있습니다.

 

교회라고 해도, 신앙의 중심점, 중심방향이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럴 경우 양쪽에서 신앙생활을 하면 영성의 방향이 이리로 갔다가 저리로 갔다가.. 할 수 있습니다. 일관성있게 한 방향으로 나아가지 못하면 그것은 오히려 방해가 될 수 있습니다.

 

내가 깨달은 바로는, 신앙의 이러한 점이 틀린 것이다.. 라고 설명하는데, 그쪽을 지향하는 곳에 동시에 교류를 하고 있다고 합시다. 이것은 곤란할 것입니다. 이러한 경우라면, 서로의 주장이 다르기 때문에 본인이 생각하기에 맞아 보이는 한쪽을 선택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 아플 때, 치유의 방향을 정해야 합니다. 한약을 먹든지, 양약을 먹든지, 자연치유 쪽을 선택하든지.. 해야 합니다. 그런데 동시에 한약도 먹고 양약도 먹고 자연치유도 하고.. 하면, 효험이 있거나 아플 때, 무엇 때문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의 치유법을 사용하다가, 아 이것은 효험이 없구나.. 생각되면 그 치유법을 내려놓고 다른 치유법을 찾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헤븐에 오는 순간, 모든 다른 교류를 끊으라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신앙의 방향이 분명해질 때까지.. 인생이 오직 주님 한분을 알아가는 과정이라는 것.. 이 방향이 선명해지기 까지 사람들은 여러 가지 형태의 신앙패턴에 영향을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소극적으로 드러내지 않고 여기 저기 집회에 다니는 것을 일일이 추적해서 금할 수야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의 모임에서 교제를 나누는 가운데, 다른 곳에 대한 홍보나 권유나 강한 주장을 주도적으로 나타낸다면 그것은 곤란한 일입니다.

 

모든 이들이 주를 좇지만, 방법론은 다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자기 부인과 같은 문제에 대해서.. 아주 심각하고 비장한 스타일로 자기 파쇄를 이루려고 하는 신앙패턴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것은 헤븐 스타일과는 많은 차이가 있는데, 언젠가 그러한 단체에 속한 자매가 조모임에서 다소 강력한 자세로 그러한 주장을 한 적이 있어서 담당사역자에게 보고가 되었고, 대화를 나누다가 그녀가 소속되어있는 곳의 가르침과 헤븐스타일이 많이 부딪치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사역자는 그녀에게 사랑의 마음을 전하면서도, 방향이 다르니 어느 한쪽을 선택해야 함을 전했고, 자매는 헤븐을 좋아했기 때문에 여러 날 고민했지만 결국 떠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경우는 마음이 아프기는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누구나, 자기가 가지고 있는 확신을 따라 움직이는 것이 좋습니다.

헤븐스타일은 가볍고 자유롭습니다. 그다지 심각하지 않습니다. 이를 악물고 자기를 깨뜨릴 때 파쇄와 승리가 오고 죄에서 해방된다고 믿지 않습니다.

단순히 주를 받아들이며 높이고 기뻐합니다. 애쓰면 애쓸수록 더욱 더 깊이 죄의 늪에 빠지고 묶인다고 여기며, 주의 이루심을 찬양하고 즐거이 순복할 때 서서히 죄성이 사라지고 승리가 온다고 여깁니다.

 

우리는 전에 죄를 이기려고 이를 악물고 금식하고 기도하고 애쓰고 온갖 노력을 했지만 이기지 못하던 것을 아주 쉽게 극복하게 되었다는 승리의 고백을 무수하게 듣습니다. 간증들을 모으면 책도 만들 것입니다.

 

헤븐스타일은 복음 안에서 그저 웃고 울고 떠들고 놀고 기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십자가와 광야의 경험을 놀이처럼 생각합니다. 그래서 헤븐에 온 지 몇 달 지나면 얼굴 표정자체가 초기의 경직됨이 사라지고 부드럽고 자연스럽고 환하고 밝아지며 웃음이 많아집니다.

 

그러나 이를 악물고 애쓰며 자기 파쇄를 위하여 노력하는 신앙스타일의 사람들을 보면 인상이나 말투도 거칠고 경직되어있고 공격적인 면이 있어서 우리는 그러한 패턴의 신앙에 대해서 주의를 주고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신앙의 패턴에 따라서 열매가 다르고 부딪침이 있으므로 우리는 그 차이점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선택권을 줄 수밖에 없습니다. 누구나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 것을 선택할 권리가 있는 것입니다.

 

 

다섯 번째로, 이 부분은 많은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나는 자주, 영적으로 성장이 되지 않는 이들은 이 교회를 떠나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오래 있어도 성장이 되지 않고 변화된 열매가 부족한 이들은 사역자가 다가가서 (집사님.. 여기 말고도 좋은 교회가 많습니다) 라고 이야기할 것입니다] 라는 메시지를 아마 여러 번, 많이 들었을 것입니다. 4-5주 계속 거듭 이런 식으로 이야기한 적도 있었습니다.

 

나는 이러한 메시지를 통하여 많은 성도들이 이 교회에서 쫓겨나지 않을까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나중에 알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메시지를 전하면서도.. 그것은 결코 성도들이 싫어서가 아니고, 겁을 주어서 군림하려는 것은 결코 아니며, 우리의 목표가 교회가 아니고 주님이어야 한다는 것임을 나는 항상 밝혔었습니다.

 

우리의 목표는 교회가 아닙니다. 교회는 하나의 수단에 불과하며 우리는 교회에서 교제하고 가르침을 받으며 결국은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만나고 누리고 경험하여 그 열매를 맺기 위하는 것이 목표입니다. 우리의 만남에는 항상 기쁨이 있기 때문에 흔히 이 기쁨 자체에 몰두하는 경향이 있을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모든 모임에 사람들이 참가하려고 난리를 피웁니다. 꼭두새벽에 일어나 WCC 반대운동을 위하여 부산에 왕복 십여시간을 가는 여행에도, 운동회에도, 어떤 모임이든.. 사람들은 절대로 빠지지 않으려고 합니다. 가정에 심방을 가는 것도 그래서 숫자를 제한하려고 고민을 하게 됩니다. 이것은 만남에 항상 즐거움과 웃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나는 여기에 경고를 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우리끼리 웃고, 즐기고 놀고. 행복해하고, 사랑하고.. 이러한 것에 집착해서는 안 된다고.. 그 모든 것보다 중요한 것은 주님을 알아가는 것이라는 사실을 다시 확인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은 짧습니다. 우리는 목숨이 있는 동안 주님을 알아가며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오래 동안 믿고 있는데도 아직 열매가 부족하다면, 그는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자신이 복음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지, 바르게 가고 있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어떤 이들은 헤븐 스타일이 자신에 맞지 않을 수 있습니다. 여기에 있으면서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아직 변화된 간증이나 열매가 부족하다면, 그는 헤븐 스타일이 자신에게 도움이 안 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한 경우, 우리를 떠나도 좋으니.. 우리 교회를 떠나도 좋으니.. 다른 데 가서라도 꼭 주님을 경험하고 열매를 맺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도들이 싫어서 가라는 것이 아닙니다. 너무나 사랑하고 그리워하지만, 그들의 성장을 위해서, 행복을 위해서 보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전하는 것으로 변화와 자유함을 누리고 경험하지 못한다면, 다른 데 가서라도 영혼이 살아야 한다는 것이지 잘못한다고 쫓아내는 것이 아닙니다.

 

가기 싫으면 안 가도 됩니다. 예배가 좋고, 떠나기가 싫다면 떠나지 않아도 됩니다. 하지만, 성장을 위해서는 떠나는 것을 고려해도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제대로 못하면 쫓겨난다고 오해하고 있는 성도들이 많이 있음을 나중에야 알게 되었습니다. 

 

가족들과의 불편한 관계로 인하여 오지 못하게 된 이들도, 쫓아낸 것이 아닙니다.  자격이 없다고 오지 말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을 향한 그리움은 여전하지만, 그들이 가정에서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것이 안쓰러워서, 그들의 행복을 위해서 우리의 그리움을 절제하고 예배참석을 절제시키는 것입니다. 본인들이 만약 그것을 원하지 않으면 올 수도 있습니다. 다만 우리는 그들이 고통받는 것을 걱정하고 안쓰러워한다는 것입니다. 쫓아내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한국 교회에 성도들을 향한 사역자들의 집착과 경쟁을 많이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너무나 싫었습니다. 나는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성도는 한 숫자가 아니고 천하보다 중요한 하나의 영혼입니다. 나는 사람들이 편하게 올 수 있고, 편하게 갈 수 있는 교회, 사역자가 되고 싶었습니다.

이런 설교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어떤 형제 목사님이 있었는데, 형과 동생이 위치는 잘 기억이 안 나지만, 서울과 인천인가에서 큰 교회를 하고 있었습니다. 형의 교회에 소속되어 있는 장로님이 동생목사님의 교회 바로 앞에 살았습니다.

 

그래서본 교회에 가는 것이 너무 멀기도 하고, 동생목사님이라 서로 잘 아는 사이이고 하니, 교회를 옮기고 싶다고 해서 동생목사님이 형에게 허락해달라고 전화를 했다고 합니다. 그러자 형이 욕을 하면서 거절했다고 하며, 이 예화를 전하면서 설교자는 목소리를 낮추어서 [친 동생의 교회에 가겠다는 데도 화를 내고 거절한 목사.. 이것이 성도를 향한 목사의 사랑입니다] 하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설교를 듣고는 별로 동의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사랑인지, 욕심인지 어찌 아는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한 경우의 판단기준은 무엇이 되어야 할까요? 그것은 상대방, 당사자의 행복입니다. 상대방이 떠나서 행복하다면, 그 때는 축복하고 보내야 합니다. 떠나서 행복하지 않다면, 떠나지 않게 해야 합니다.

 

판단의 기준은 내 마음, 입장이 아니고 상대방의 입장, 행복이 되어야 합니다. 성도가 떠나는 것을 좋아한다면, 목사님은 기쁨으로 축복하고 보내야 합니다. 성도가 싫어한다면, 보내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이 기준입니다.

나의 경우는 강요를 많이 싫어합니다. 내가 아무리 원하는 것이라고 해도, 상대방이 그것을 원하지 않는다면 절대로 강요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서로를 불행하게 합니다.

스토킹을 사랑이라고 여기는 이들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나의 행복을 위해서, 너는 절대로 아무 데도 가서는 안 돼.. 너는 나를 떠날 수 없어..] 이런 것을 아름다운 사랑이라고 여기는 이들은 없을 것입니다. [네가 행복하다면, 나는 괜찮아..] 이것이 바른 자세일 것입니다.

 

아내와 연애 중이었을 때, 아내는 부모님의 반대로 몹시 힘들어 했습니다. 그녀는 한 번도 부모의 말을 어겨본 적이 없었습니다. 학벌이나 돈이나.. 모든 여건들이 나와 그녀는 상대가 되지 않았습니다. 나는 힘들어하는 그녀를 보내 주려고 했습니다.

 

나 때문에 고생하는 것이 미안하다고.. 다른 데 가서 행복하게 살라고.. 그런데 아내는 가지 않고 울었습니다. 내가 다른 데 가서 행복할 것 같으냐고.. 그녀는 울고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직장에 다니며 나의 용돈, 등록금을 도와주었고 주위의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지금 그녀의 신세를 갚고 있습니다. 그녀가 떠난다면 나는 미안해서 잡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가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감사하는 마음으로 같이 살게 되었습니다.

성도들을 대하는 나의 입장도 이와 비슷합니다. 나는 오는 이들을 막지 않습니다. 또한 가는 이들을 잡지 않습니다. 사랑하지만, 떠나보내기도 합니다. 눈물이 흐르지만, 그래도 사랑을 고백하고 축복합니다. 그들이 행복하고, 주님을 알아가는 것이 나에게 더 기쁨이 되기 때문입니다.

 

 

최근 들어 부사역자가 떠나간 이들에게 연락을 취하게 되었습니다. 교회를 떠나서 서운해 하고 있는 이들도 있고, 그리워하고 있는 이들도 있다는 이야기를 여러 경로를 통해 듣게 되어서 그들에게 연락해서 안부를 나누고 축복해주기를 원했습니다.

 

 

헤븐을 떠나서 다른 곳에 잘 정착한 이들도 있었습니다. 이 경우에 우리는 아무 부담이 없습니다. 이들은 우리에게 맡겨진 양이 아니기 때문에 그저 추억을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감사하고 사랑의 안부를 전하며 축복하면 됩니다.

 

서운함을 가진 이들도 있었습니다. 자신은 그리 잘못한 것이 아닌데 부당한 징계를 받았다고 억울해하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화를 내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부사역자는 이런 경우 상대방의 분노를 그대로 받아들이며 일체의 변명 없이 사죄를 하고 축복하고 결국 사랑의 관계로 마무리하게 됩니다. 상대방이 마음이 상했다면 그때는 오해든, 무엇이든.. 옳고 그름이 의미가 없습니다. 그 때는 오직 사과하고 마음을 풀어주어야 합니다.

 

우리가 충격을 받았던 것은 대부분 사람들의 반응이었습니다. 자신들의 의지로 떠나간 이들 대부분이 엄청난 후회를 하고 우리에게 연락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다른 곳에서 도무지 적응을 하지 못하고 슬픔과 눈물로 폐인처럼 사는 이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얼굴도 상하고, 체중이 엄청나게 줄어든 이들도 있었습니다.

 

오래된 핸드폰을 바꾸지 못한 이도 있었습니다. 전화번호가 바뀌면 연락이 끊어질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일체 외출도 안하고 오직 전화만 기다리던 이도 있었습니다.

차마 본인은 연락할 수가 없어서, 몇 년을 기도드리며,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면, 제발 헤븐에서 전화가 오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이도 있었습니다. 참 기가 막힌 일이었습니다.

이들은 다들, 자신은 헤븐에 갈 자격이 없다고 여기고 있었습니다. 나와서 영적으로 더 엉망이 되었기 때문에 돌아갈 수 없다고 여기고 있었습니다. 불편하게 교회를 나왔기 때문에 자기를 미워할 것이라고 여기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조언을 거절하고 불편한 태도로 나간 이들도 있었습니다. 이들은 자기의 결정을 후회하지만 다시 돌아갈 수는 없다고 여기고 있었습니다.

 

나간 후에 마음이 서운해서 우리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표현하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그들은 우리가 여전히 그들을 사랑하고 그리워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깜짝 놀라곤 했습니다.  나는 웃으며 말하곤 합니다. [뒤에서 욕하는 것은 괜찮아요. 앞에서만 욕하지 않으면 됩니다.] 이러한 이야기에 힘을 얻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사랑하고 즐거웠던 관계가 나중에 불편해지고 오해가 생기는 것은 사역에 있어서 흔히 있는 일입니다. 울면서 감사하고, 목사님을 알게된 것이 너무나 놀라운 은혜라고 고백하던 성도들이 시간이 흐르면 뒤에서 욕하고 판단하는 일은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입니다.

 

상황들은 바뀌고, 여러 이유로 사이는 멀어질 수 있으며, 또한 오해를 일으키고 이간질을 일으키는 영들은 항상 있기 때문입니다. 악한 영들은 관계를 파괴하는 것, 그것이 영혼을 노략할 수 있고 떨어트릴 수 있는 좋은 방식인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 속한 사역자는 사랑의 관계가 언젠가 깨질 수도 있다는 것을 각오하면서 영혼을 사랑해야합니다. 사랑의 결과로 미움을 거둘 수도 있슴을 알고 사랑해야 합니다. 사역자는 자기의 양심을 따라 주님이 원하시는 것을 말하고 행해야 하고, 그것이 성도의 마음에 맞지 않을  때가 많이 있을 수 있기 때문에 이런 때는 관계의 불편해짐을 감수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좋은 관계, 사랑의 관계중에 있을 때에 감사하고, 이 관계들이 깨어질 때는 슬퍼하고 그리워하며 기다립니다.  성도들이 사역자를 미워한다고 같이 미워하고 서운해하는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주님께 속한 사역자라면 그것이 당연합니다.

 

그래서 나는 부사역자들에게, 성도들을 중심으로 사랑하고, 그 결과로 판단과 미움이 돌아온다면, 그것을 기꺼이 즐기는 것이 사역이라고 말합니다. 사역이란, 주님을 따라 행하고, 사랑하고 축복하며 그 결과로 굴욕을 겪는 것을 기뻐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두려워하지 않도록, 나는 최근에 성도들에게 말하곤 합니다. 혹시 여러분들이 이곳을 나가게 되면, 욕하고 싶을 때가 있으면 얼마든지 욕해도 된다고.. 안심하라고.. 그렇다고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노하시지 않으며 그 사랑을 거두시지 않는다고.. 나에게 욕을 하는 분들이 있어도 나는 개의치 않으며, 나는 아름다운 추억만을 간직하고 그들을 보고 싶어할 거라고.. 라고 말입니다.

 

 

나를 비롯해서 헤븐에 있는 이들 중에서 잘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는 다 부족하고 연약한 사람들일 뿐입니다. 여기에는 부족하고 연약한 사람들은 다 잘 적응합니다. 그러나 훌륭하고 높은 이들은 잘 적응하지 못합니다. 자기를 내세우고 알아주기를 원하는 이들은 잘 버티지 못할 것입니다.

 

자기 신앙이 좋고 대단하다고 여기는 이들은 헤븐과 잘 맞지 않을 것입니다. 나의 경우도 결코 내가 신앙이 좋다거나 주님이 특별히 사랑하시는 사람이라고 여기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부르심이 있듯이 나에게도 부르심이 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헤븐은 대단한 사람들이 자리를 잡지 못하며 부족하고 여린 사람들이 안심하고 쉬는 곳입니다.

 

 

서로간의 의사가 잘 전달되지 못해서 나갔던 이들도 더러 있었습니다. 우리는 본인들이 원해서 나가는 것으로 알고, 보고 싶기는 하지만 연락을 취할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는데, 당사자들은 자신들이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이라고 여기고 슬퍼만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교회 창립과 이동의 어수선한 상태에서 의사전달이 미비한 면도 있었습니다. 아무튼 어처구니 없는 일이었습니다.

 

 

자신은 다시는 돌아갈 수 없을 거라고 여기고 있던 떠난 이들, 그러나 돌아오고 싶어하는 이들을 우리는 다시 돌아오게 했습니다. 최근에 수 십명이 그렇게 돌아왔습니다. 매주 마다 눈물과 포옹의 잔치가 되었습니다. 모두가 서로 껴안고 울고 또 울었습니다. 많은 이들의 눈이 붕어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노란 풍선을 흔들고 하이파이브를 하고 울고 웃으며 춤을 추었습니다. 여러 주 동안 계속 잔치가 이어졌습니다.

 

돌아온 이들은 그동안 얼마나 힘들었는지.. 그리워했는지.. 이 순간을 꿈속에서도 바랐고 얼마나 수도 없이 꿈을 꾸었는지를 말하며 눈물지었고 다른 이들도 이야기를 들으며 같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우리는 천국에 있었습니다.

 

우리는 돌아온 아들을 맞이한 아버지의 기쁨이 어떤 것인지.. 충분히 알게 되었습니다. 모든 사람.. 한 사람, 한 사람의 가치는 그 무엇과도 바꿀 수가 없었습니다. 한 사람이 사라졌을 때, 우리의 심장 안에서 어떤 부분이 무너졌습니다. 그리고 그 빈 공간은 그 무엇으로도 메꿀 수 없었습니다. 그것은 대치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사람 본인 자신을 통해서만 그 함께 했던 시간들, 추억들이 회복될 수 있었습니다. 그로 인한 상처, 슬픔이 메꾸어질 수 있었습니다. 한 사람이 돌아왔을 때, 다 같이 안고 울면서.. 우리는 비로소 그 동안 이 사람을 잃음으로 인하여 우리가 얼마나 허전했었는지를 깨닫게 되곤 했습니다. 그리고 그 부분이 메꾸어지는 것을 우리는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많이 울었지만, 모두가 다 행복해서 울었습니다.  

 

나는 한 사람, 한 사람이 이렇게 소중하다는 것을.. 주님께서 한 사람, 한 사람을 이렇게 귀하게 여긴다는 것을.. 사역을 하면서.. 재회의 기쁨을 경험하면서 새롭게 배워가는 것 같았습니다. 나는 내가 이들을 이렇게 그리워하는 줄 몰랐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돌아오면서.. 깊은 속에서 어딘가 파손된 부분이 메꾸어지는 것 같았습니다.

 

여러 사역자들이 모두 울면서 느꼈던 것은.. 우리들은 우리 안의 깊은 그리움, 고통들을 그저 무시하고 참고 있었던 것 뿐이며, 다만 울지 않고, 아파하지 않고 잊으려고 애써왔을 뿐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다만, 이제는 더 이상 눈물을 억누를 필요가 없었습니다.

 

 

인간관계에 있어서, 오는 사람을 막지 않고, 가는 사람을 잡지 않는 것이 매이지 않고 자유한 법칙일 것입니다. 그러나 나의 경우는 가는 사람은 잡지 않았지만, 오고 싶은 사람이 오는 것을 많이 제한한 편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내가 아무리 상대를 그리워한다고 해도, 상대에게 피해를 주지 않을까, 내가 상대방의 성장을 막는 것은 아닐까, 상대에게는 더 좋은 길이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제, 앞으로는 오고 싶은 이들은 막지 않겠다고, 가기 싫은데 가는 사람은 없을 것이라고 성도들에게 선언하였습니다.

 

 

성도들에게 문제가 있었을 때, 조언과 징계를 하는 과정에서 사안에 따라 예배를 1주, 혹은 몇주 동안 참석하지 못하게 하는 징계가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이것을 가장 고통스러워했습니다. 우리는 논의 끝에 이것은 불합리하며, 예배는 참석할 수 있도록 하고, 예배 후의 조별 교제나 각종 모임에서만 잠시 쉬게 하는 것이 좋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나는 예배를 드리면서 선언했습니다. 앞으로, 본인이 원하지 않는 한, 교회에서 내보내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원하는 사람은 언제든지 갈 수 있지만, 원하지 않는 이들은, 본인이 원하는 한 예배를 언제나 드릴 수 있으며 여기에 소속할 수 있다고.. 사람들은 모두 환호성을 울렸습니다. 나는 그들이 그렇게 두려워하고 있는지 전혀 몰랐습니다.

우리에게는 자격이 없습니다. 우리는 아무도 대단한 사람이 아닙니다. 어떤 자격이 있는 사람, 어느 수준에 있는 사람만이 주님께 나아올 수 있다면, 주님께 당당하게 나올 수 있는 사람은 극히 적을 것입니다. 누구나.. 끊지 못하는 죄가 있어도, 부족해도, 연약해도, 한심스러워도.. 주님을 원하는 이들은 나올 수 있습니다.

 

죄를 다 끊고, 세상을 다 버리고 오라고 하면 아무도 주님께 나아오지 못합니다. 그러나 단순히 주님께 나아와서 그의 영광을 보고 누리고 경험하면, 점점 세상의 빛이 희미해져서 다른 것들을 다 버리게 됩니다. 그러므로 주님께 나아오는 데는 아무 자격 제한이 없습니다. 오직 한 가지, 주님을 원하느냐, 예배를 원하느냐 하는 것..이것이 중요합니다.

 

 

관심이 없는 이들은 아직 올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사모하는 이들은 아직 부족하고 연약하다고 해서 오는 것을 망설일 필요는 없습니다. 파산하고 망가지고 지치고 실망한 사람일수록, 오히려 자격이 있는 것입니다.

다시는 사람을 쫓아내지 않겠다고 선언했을 때, 조별 모임의 교제를 나누면서 많은 사람들이 이제는 안심이 된다고 기뻐하였습니다. 주님을 사모하고 성실한 사람들이 그러한 두려움에 빠져있는 것을 보고 정말 어처구니가 없었습니다.

 

그러한 조별 모임의 보고를 읽으면서 너무나 마음이 아프고 미안하였습니다. 나의 본심이 잘못 전달된 것에 대해서 미안한 마음이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오해를 하였지만, 그러한 오해를 제공한 것은 내게 가장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몇 주 연속.. 계속하여 이전에 떠났던 사람들이 돌아올 때.. 그 마음을 무엇이라 표현할 수가 없었습니다. 나는 이들이 돌아온다는 연락을 받은 토요일 밤에는 도무지 잠을 이룰 수 없었습니다. 가슴이 벅차고 설레어서 자리에 앉았다, 누웠다, 일어나서 걸어다니다.. 하면서 밤을 새우게 되었습니다. 돌아오는 사람들에 대한 생각 때문에 도무지 설교메시지에 집중할 수가 없었습니다. 나는 주님께서 우리를 이처럼 그리워하고 기다리시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성도들은 내가 자기들의 개인적인 상황들을 일일이 알고 있는 것을 잘 모릅니다. 예배가 끝나고 조별 모임에서 나누었던 사소한 이야기들, 부사역자와 상담한 내용들. 심방에서 나눈 대화들.. 사소한 것들도 내가 다 내용을 읽고 보고받고 알고 있는 것을 모릅니다.

 

우리가 그들의 문제들, 변화들, 영적 상태들에 대해서 많은 대화들을 나눈다는 사실을 모릅니다. 우리는 각 성도들의 상태에 대해서 사역자들끼리 모여서 진단과 처방과 도울 수 있는 방향들에 대해서 나눕니다. 성도들은 이러한 것들을 잘 모를 것입니다.

 

 

수백명의 성도들이 같이 예배를 드리기 때문에 자신에 대해서 잘 모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복도나 예배당에서 만나서 간단하게 인사를 나누며 그들의 당면한 상황이나 문제에 대해서 묻거나 이야기를 나눌 때 깜짝 놀라곤 합니다. 아내도 성도들을 만나서 그들의 상황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면 그들이 깜짝 놀라는 것을 많이 본다고 합니다.

 

하지만, 사역을 해보면.. 사역자에게 있어서 성도들의 문제나 삶은 아주 중요한 관심거리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사역자는 성도들이 주님을 경험하고 변화와 승리를 경험하고 간증할 때, 그것을 보고 기뻐하고 눈물을 흘립니다. 또한 성도들이 어려움을 겪거나 할 때 잠을 이루지 못하고 걱정하고 씨름합니다.

나는 직접 부딪치지 않고 대화를 거의 해보지 않은 이들.. 단순히 그들의 이야기에 대한 보고를 받고 보고 내용을 읽기만 해도 그들에 대한 깊은 친밀감을 느끼는 편입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교육 내용을 읽고 살아온 인생살이의 버거움에 대해서 읽으며 걱정하고 아파하고 축복합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변화들.. 기쁨과 웃음과 자유를 경험하는 변화들은 내게 큰 기쁨이 됩니다. 적응하지 못하고 떠나간 이들이 있을 때 아쉬움과 안타까움이 있고 가슴의 한 군데가 무너지는 느낌을 받기도 합니다. 그러면 그 가슴이 회복될 때까지 그들을 주님의 손에 올려놓으며 축복합니다.

그러한 내가, 오랜 시간을 같이 보내며 지금은 함께 하지 못하고 있는 이들에 대한 그리움과 애정을 가지고 있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내일 온다니.. 내가 어떻게 잠을 잘 수가 있을까요.. 나도 아내도.. 추억을 말하며 서로 눈물을 흘리고.. 그렇게 밤들을 보내곤 했습니다. 재회처럼 아름다운 것은 세상에 없습니다.

 

 

사역자라면 모두가 이것을 공감할 것입니다. 목회를 하면서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친밀한 성도와 헤어지는 것입니다. 그것은 실연당하는 느낌과 흡사합니다. 아니, 그다지 친밀감을 나누지 않았던 성도들과도 일단 헤어지면 한 동안 앓게 됩니다.

 

그것처럼 가슴이 미어지는 일은 없습니다. 많은 반복되는 고통과 찢김의 경험을 통하여 모든 인간적인 애정을 주님께 드리고 내려놓게 되지만, 그러나 감정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상대방을 사랑하고 축복함으로 주님께 드리고 주님이 모든 것을 지배하시도록 합니다. 그러나 여전히, 이별이란 가장 고통스러운 것이며, 재회란 가장 아름답고 행복한 경험이 되는 것입니다.

 

 

이 시기에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한 학생아이가 여러 이유로 집을 떠났습니다. 아이의 엄마 아빠는 거의 죽은 목숨과 같았습니다. 아이가 집을 떠나면.. 부모들은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닙니다. 잠도 오지 않고 입맛도 잃습니다. 살기도 싫어집니다. 주님께 애정의 주도권을 드리는 훈련이기는 하지만, 쉬운 훈련은 아닙니다.

 

몇 달간의 기도전쟁이 있었고, 드디어 아이가 돌아올 가능성이 생겼습니다. 롯데리아에서 아이를 만나기로 했는데, 아이는 아직 돌아올 결심을 하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우리는 미리 롯데리아 지하층 전체를 빌리고 40여명이 노란풍선을 불어서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지루한 기다림 끝에 아이가 롯데리아에 도착하고, 우리는 모두가 노란풍선을 들고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었습니다. 깜짝 놀란 아이는 폭풍 눈물과 함께 우리 모두에게 안겼습니다. 우리는 모두 울었습니다.

비슷한 일들이 최근에 계속 되었습니다. 이것은 우리 모두를 벅차게 했습니다. 재회처럼 놀라운 것은 세상에 없습니다.

 

 

여러 사람이 돌아온 주일 밤, 나와 아내는 벅찬 가슴으로 끝없이 대화를 나누며 잠을 이룰 수 없었습니다. 나는 아내에게 말했습니다. [설명할 수가 없어. 가슴이 벅차서 잠이 안와.. 기분이 정말 이상해.. 정말 천국에 있는 것 같아..]

아내도 대답했습니다. [나도 그래요. 정말 가슴이 너무 너무 벅차요..] 아내는 행복하다고 말하면서도 계속 눈물을 흘렸습니다.

 

 

나는 활동적인 기질이 아닙니다. 드러나는 일들, 많은 사역을 하거나 많은 사람들 앞에 나서는 것을 불편해합니다. 가장 행복해하는 일이라면 혼자서 조용히 주님 앞에서 기도를 드리는 것이며, 소수의 사람들과 도란도란 대화를 나누는 것을 좋아합니다. 눈썰미도 없어서 사람들을 많이 보아도 이름과 얼굴을 잘 기억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사역을 하면서.. 한 사람.. 한 사람의 얼굴이.. 이름이.. 사정들이.. 특징들이.. 점점 쏙쏙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마치 연인들과 사랑에 빠지듯이 영혼들을 그리워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책을 써야하기 때문에 집회인도를 조금씩 내려놓아야 되겠다.. 생각을 하면서도.. 막상 주일이 되면 사람들이.. 교회 식구들이 그립고 보고 싶어서 견딜 수가 없어서 나도 모르게 교회로 걸어가게 되었습니다.

 

 

어린 아가들, 아이들은 말할 것도 없고, 할머니들, 할아버지들, 연세가 드신 분들도.. 어찌나 아름답고 보고 싶고 사랑스러운지.. 가슴이 그리움으로 뜨거워지곤 하였습니다. 강대상에 올라가서 조용히 이 영혼들을 바라보고 있으면 말하는 것도 잊은 채 행복감으로 가슴이 설레고 따뜻해지곤 했습니다.

 

이것은 내게 전에 없었던 일이었습니다. 나는 주님께서 나에게 그분의 마음을 부어주시는 것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일흔이 넘은 할머니들이 그토록 사랑스럽게, 아름답게.. 갓 태어난 아이처럼 느껴지지 않을 것입니다.

돌아온 사람들로 인하여 너무 가슴이 벅차서 밤새 잠을 이룰 수 없었던 날밤.. 나는 이것이 주님의 마음인 것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나는 사람들을 오래 동안 보고 싶어 했지만, 그들이 우리를 싫어하기 때문에 다시는 보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또한 떠나간 많은 사람들은 자신들이 돌아가고 싶지만 우리가 그들을 싫어하기 때문에 다시는 갈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우리들은 서로 간에 오해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한 오해들이 사라지고 다시 만나게 되었을 때, 그것은 정말 천국과 같았습니다. 오래동안 상하고 망가졌던 사람들을 다시 축복하고 회복시키는 것은 정말 행복한 일이었습니다.

오늘날 주님을 등지고 있는.. 많은 사람들도.. 어쩌면 비슷한 오해를 하고 있을지 모릅니다. 나는 주님께 돌아갈 자격이 없고, 주님은 나를 좋아하실 리가 없다고.. 나는 주를 아프게 했다고.. 그러니 나를 싫어하실 것이라고.. 그렇게 오해하고 있을 지도 모릅니다. 악한 영들은 우리에게 계속 그런 거짓의 생각을 넣어줄 것입니다.

 

그러나 오해가 풀리고 그리움이 회복되고 주님 앞에 서게 될 때, 그것은 곧 천국과 같은 것입니다. 우리는 언젠가 그 풍성한 천국의 잔치, 회복의 잔치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최근 반복하여 작은 천국의 잔치를 경험하였습니다. 돌아옴과 회복을 경험하였습니다. 헤어짐의 고통과 재회의 기쁨을 경험하였습니다. 같이 포옹하고 눈물을 흘리는 순간.. 그 모든 오해들은 사라졌습니다.

 

서로 얼굴을 보고 포옹하며 눈을 바라보고, 흐르는 눈물을 보게 되면, 상대가 진정 자신을 사랑했다는 것을.. 그리워했다는 것을 그냥 알게 됩니다. 더 이상 오해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다들 서로 속고 있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사랑과 그리움은 숨길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움은 은혜입니다. 재회는 천국입니다.

 

 

주님께로 돌아갈 때, 거기에는 벅참이 있습니다. 설레임이 있습니다. 그것은 잔치이며, 천국입니다. 우리는 상황이 좋아지면, 우리가 좀 더 변화되면 돌아가겠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좋아져서 돌아가는 사람은 없습니다. 주님께로 돌아설 때 비로소 우리는 변화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가장 엉망진창일 때, 주님께 나아와야 합니다.

아직 우리는 주님께로 온전히 돌아서지 않은 부분들을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가 세상에서 고통을 겪는 이유입니다. 우리가 온전히 주님께로 돌아설 때, 그 때 모든 속임들, 어두움들은 빛 가운데 사라질 것입니다. 힘을 잃을 것입니다.

 

아직 돌아오지 않은 가족들도 있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아름다운 재회를 꿈꾸고 있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가족이 돌아올 때, 우리는 좀 더 온전함에 가까와지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으로만 채워질 수 있는 분량이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여러가지 사정으로 떠나는 이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슬퍼하고 아쉬워하고 축복하며 그들을 보냅니다. 사랑의 축복으로 보내면서, 우리는 헤어지는 순간부터 다시금 재회의 행복을 향한 그리움을 쌓아가기 시작합니다. 주님을 같이 나누고 누린 관계라면, 같이 주를 갈망하고 추구하는 가족이라면.. 아무리 짧아도 거기에는 아름다운 추억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 추억을 그리워합니다.

 

 

최근 우리는 계속 천국 중에 있었습니다. 언제까지 계속될까요? 그것은 끝없이 이어질 것입니다. 주님을 향할 때.. 거기에는 계속적인 천국의 폭죽이 있습니다. 날마다 그 폭죽의 불꽃놀이가 이어집니다.

이 불꽃놀이는 꺼지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은 세상이 알 수 없고 볼 수 없는 것이지만.. 그것은 부르심을 받은 자들, 주안에 거하며 주를 따르는 이들이 경험할 수 있는 내면의 축제입니다. 스데반도.. 마지막까지 이 불꽃놀이의 축제 속에서 기쁨으로 빛나는 얼굴로 눈을 감았습니다.

 

우리는 주님 안에 있습니다. 우리는 천국에 있습니다. 우리는 주를 따를 것입니다. 벅차고, 설레이는 마음으로.. 감사하고 사랑하며 주를 따라갈 것입니다. 그리움의 축복, 재회의 축복을 이 땅에서도, 그리고 영원한 곳에서도.. 우리는 영원히 누리게 될 것입니다. 할렐루야. 

출처 : 정원목사 독자 모임
글쓴이 : 정원목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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