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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 ♡

[스크랩] 영적 성장의 과정들에 대하여

by 샬롬♡예루살렘 2013. 10. 29.

 

 

 

앞에서 교구 편성의 변화에 대해서 이야기하면서, 영적 성장의 과정에 대하여 조금 나누었습니다. 언젠가 책으로 자세하게 나누겠지만, 이것에 대해서 여기에서 조금만 더 이야기해보고자 합니다. 영적 성장의 과정과 방향을 이해하는 것은 신앙의 성장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최근 들어서 신앙의 기초를 다지는 면에서 은혜의 복음, 죄사함, 풍성한 삶에 대한 이야기를 몇 달째 나누고 있습니다. 주일에 전한 메시지들은 교제로 정리되어 교구모임 때 이것을 사용해서 다양한 훈련과 적용, 나눔으로 이어집니다.

 

몇 달째 선포되는 복음의 메시지를 통하여 사람들은 많은 기쁨을 누리고 있습니다. 두려움, 염려, 자학, 자책 등.. 다양한 묶임에서 많은 자유를 얻었다는 고백을 많이 듣고 있습니다.

 

복음 안에 있는 인생의 아름다움, 삶의 황홀함에 대해서 배우면서 평생의 삶 중에서 지금이 가장 행복한 나날들이라는 고백을 하는 이들이 많아졌습니다. 가족이나 사회에서의 대인관계에서 불편했던 부분들이 사라지고 좋은 관계가 되었다는 고백도 많이 있었습니다.

 

우리에게 베푸시는 주의 은혜에 대해서 알게 되고, 은혜의 삶에 대해서 깨닫게 되면, 우리의 삶에서 대인관계나 모든 면에서 은혜의 시각을 갖게 되고 자신이나 타인에 대해서 정죄의 시작이 사라지기 때문에 변화와 승리가 나타나게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 사람들이 이러한 기쁨들에 취한 나머지, 이렇게 여기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복음이 이렇게 놀랍고 좋은 것인데, 이보다 더 나은 삶도 있을까? 지금은 첫 번째 단계, 은혜를 거저 누리는 단계이기 때문에 이처럼 행복한 것이 아닐까? 이제 은혜의 삶이 끝나고 광야로 들어가게 되면, 엄청난 메마름과 고통 속에 들어가는 것은 아닐까? 주로 이런 생각들을 하는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신앙의 첫 단계에서 주님의 마음을 이해하게 되고 은혜와 사면에 대해서 깨닫고 경험할 때, 그 기쁨과 해방감이 엄청난 충격으로 다가오고 천국과 같은 행복을 느끼게 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초기의 은혜에 비해서 나중에, 이후에 경험하는 것들이 메마르고 고통스럽기만 할 것이라고 여기는 것은 정말 오해입니다.

 

신앙의 삶은 영광스러운 것입니다. 신앙이 무엇인지 알아갈수록, 주님을 따르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갈수록.. 산다는 것이 황홀하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어떤 일본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분이 사고로 식물인간 비슷한 상태가 되었습니다. 멀쩡한 것은 눈을 깜빡거릴 수 있다는 것 뿐이었지요. 그 이외에는 아무 것도 움직일 수 없었습니다. 손가락하나도요.. 그리고.. 정신 상태는 아주 멀쩡했습니다. 하지만, 정신이 멀쩡하다는 것이 이 사람에게는 얼마나 고통스러운 것이었을까요.. 이 사람은 자살도 할 수 없었습니다. 누군가가 도와주어야 그것도 가능한 것입니다.

 

이분이 어느 날 복음을 전해 듣게 되었습니다. 복음을 듣고 깨닫자 이 분은 엄청난 자유와 희열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겉사람이 멀쩡할수록 영은 둔하지만, 겉의 몸이나 환경이 엉망일수록, 오히려 속사람은 예민해지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천국의 영계를 쉽게 접하는 것입니다.

이분은 자신에게 임한 주의 사랑에 보답을 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그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었습니다. 고민 끝에 그는 시를 쓰기로 했습니다.

 

하지만 꼼짝도 할 수 없는 그가 어떻게 시를 쓸 수 있을까요? 그는 이런 방법을 생각해냈습니다.

그가 누워있는 침상의 벽에 자음과 모음의 철자를 붙여놓았습니다. 그리고 한 사람이 펜으로 한 글자, 한 글자를 짚어갑니다. 그럴 때 이 분이 마음속에 있는 자음에 펜이 도달하면 눈을 깜박입니다. 이렇게 해서 자음 하나가 선택됩니다. 그리고 다음에는 모음을 짚어갑니다. 그리고 다시 깜박입니다. 그러면 한 글자가 나오는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해서 쓰여진 시집의 제목이 [네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입니다. 시집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지요. 이것은 하소연하고, 슬퍼하고.. 하는 내용이 아닙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은혜와 사랑에 대해서 기뻐하고 감사하는 내용입니다. 복음을 알고 주님을 알면, 식물인간 비슷한 형태의 사람도.. 자기 안에서 끝없이 일어나는 기쁨의 생수를 느끼고 경험하게 됩니다. 그것은 환경이나 몸의 질병과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복음의 능력은 그것보다 큽니다.

 

 

그렇기 때문에 초대교회 사람들은 사자의 입에 찢겨죽으며 웃었고, 화형대에서 불사름을 당하면서도 죽기까지 찬송을 멈추지 않는 것입니다. 영화 [쿼바디스]에서 네로는 사자에게 찢겨죽은 그리스도인들의 시체를 보면서 황당한 얼굴로 말합니다. [이놈도 웃으면서 죽었네!] 그것이 바로 실제적인 그리스도인의 간증입니다. 주를 아는 사람은 환경과 상황을 초월하여 사랑하고 감사하고 기뻐합니다.

 

 

광야는 흔히 알고 있는 것처럼 메마르고 고통스러운 장소가 아닙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분명히 메마르고 고통스러운 면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외부의 생명이 제거되는 훈련이며 겉에는 고통이 있지만, 속의 생명에는 놀라운 아름다움이 일어나고 있는 과정인 것입니다.

 

신앙에는 복이 있습니다. 아직 영혼이 어린 사람에게는 육적인 차원의 복이 주어집니다. 어린아이들은 부모가 잘못된 것을 교정하고, 가르치면.. 부모가 자기를 미워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아주 어린 사람은 많은 것을 배울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영이 점점 자랄수록, 그들에게는 감추어진 복이 임하게 됩니다. 세상에 감추어지고, 필설로 표현할 수 없는 축복이 임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스데반처럼, 돌에 맞아죽으면서도 얼굴이 천사와 같이 빛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애굽을 나온 이스라엘 사람들은 광야에서 여호수아, 갈렙을 제외하고는 다 죽습니다. 원망하다가, 불평하다가, 탐심을 품었다가, 대적하다가.. 다 죽었습니다. 이것은 개인적으로 보면 실패 같이 보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전체로 보면 이것은 실패가 아닙니다. 이스라엘은 광야를 통과하고 가나안에 정착합니다.

 

이 광야의 훈련은 전체적으로 보면, 자아적이고 육신적인 욕망들이 다 드러나고 처리되는 과정입니다. 그런 후에야 가나안 정복 전쟁을 제대로 치를 수 있습니다. 광야는 내면의 무장 훈련을 받는 과정이며 가나안 정복의 무기와 능력을 받는 기간입니다.

광야는 외면에서는 보이지 않는 내면의 영광을 경험하는 시기입니다.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인도받는 삶이 무엇인지 배우고 경험하는 기간입니다. 땅의 양식이 아닌, 하늘의 만나가 무엇인지 경험하는 시기입니다. 심령 깊은 곳에서 넘치는 생수의 강, 반석에서 흐르는 생수를 경험하는 시기입니다.

 

이것은 첫 번째 영역에서 경험하는 은사적인 경험과 다른 영역의 경험입니다. 이것은 내면적이며 생명적인 것입니다. 은사와 능력과 기적은 누구에게나 드러나고 보이지만 광야의 내적 경험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고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저 사람이 어떤 상태에 있으며 누리고 있는지 아무도 알지 못합니다. 그것은 내적인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음성 듣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아직 애굽을 통과하지 못하고, 광야에 이르지 않은 상태에서 귀를 기울이다가 악령에게 눌려서 삶이 피폐해지는 일들은 아주 많습니다. 광야에 이르지 않은 사람이 기름부음, 몸에 임하는 감각을 좋아하고 쓰러지는 것을 좋아하다가 이상한 영을 받고 혼미함에 빠지는 경우도 아주 많습니다.

 

광야의 훈련을 통해서 내면적인 것을 분별하는 것을 배우지 않으면 생명의 내적 감각이 없기 때문에 분별력이 부족하여 지적인 사람은 논리에 속고 정서적인 사람은 느낌에 속으며 의지적인 사람은 야망과 꿈에 속습니다. 그리하여 영적 실제를 알지 못하고 혼미한 영에게 속아서 허상 속에서 살게 됩니다. 이러한 것을 실제적으로 배우고 경험하며 영적인 분별력과 시야가 확보되는 곳이 광야입니다. 광야 훈련의 아름다움과 풍성함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입니다.

 

 

하지만 이 영역에서 훈련을 받는 이들은 많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조금만 고난이 있으면 흔히 광야의 체험이라고 생각하지만, 많은 경우 그것들은 애굽의 경험입니다. 애굽에서 바로에게 고통을 겪는 것입니다. 애굽에서 겪는 고통은 악령들에게 시달리는 것이며 광야에서 겪는 고통은 하나님께 훈련을 받는 것입니다.

광야는 고통을 경험할수록 내적인 실제, 그리스도의 실제가 증가됩니다. 그러나 애굽의 고통은 단지 시간 낭비일 뿐입니다. 여기서는 얼른 나와야 합니다.

 

 

그러므로 얼른 애굽을 마치고 피의 바다를 건너서 광야에 들어가 다양한 훈련을 받으며 가나안 정복을 위한 무기를 받고 그리스도의 형상을 경험하는 것.. 이것은 아주 아름답고 귀한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이들은 이 단계로 나아가지 못합니다. 그 이유는 애굽을 제대로 통과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애굽을 통과하는 것을 거듭남의 경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거듭남의 경험을 가지고 있는 이들은 많지 않습니다.

 

십자가 보혈의 복음, 이를 통한 그리스도의 완전 속죄, 사면, 용서.. 이것을 온전히 믿어야 애굽을 통과할 수 있습니다. 그 피 안에는 모든 재앙 저주 심판을 끝내는 요소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거룩과 진노를 만족시킬 수 있는 것은 오직 십자가의 보혈 밖에 없습니다.

애굽 단계의 중심 키워드는 보혈입니다. 광야의 중심 키워드는 십자가입니다. 가나안의 키워드는 부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중에서 중심적인 것이라면 십자가입니다. 광야의 십자가 경험.. 이것이 기독교 신앙의 중심적 위치에 있는 것입니다.

 

 

애굽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로 인한 완전한 사면이 중심 메시지이며, 광야는 주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셨지만, 거기에 머물지 않고 나도 그리스도와 같이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경험이 점진적으로 이루어지는 과정입니다. 그것은 영적으로는 단번에 죽음이 이루어지지만, 물리적, 현실적으로는 점진적으로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게 됩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무한한 생명이 우리 안에서 실제가 되게 하는 과정과 경험이 광야의 훈련입니다.

 

 

가나안의 정복과 경험들은 아주 신비하고 신령한 것으로 알고 있지만, 그 가나안의 승리는 광야에서 받은 훈련과 경험을 그대로 적용할 때 이루어지는 헤븐의 확장, 왕국의 확장입니다. 천국을 좀 더 구체적으로 경험하며 하늘에서 이루어진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의 삶, 영역 속에서 구체적으로 이루어지는 승리의 경험들입니다. 그것은 광야의 훈련, 십자가 훈련을 얼마큼 잘 통과했느냐에 따라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키워드의 중심은 십자가이며 광야의 훈련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의 중심은 십자가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거룩한 훈련이.. 애굽을 아직 통과하지 못한 상태에서는 시작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랫동안 예수를 믿어도 실제적인 주님과의 교류를 알지 못하고, 외적인 상태, 은사적이고 물리적인, 육체로만 예수를 아는 차원에 머물러 있게 되는 것입니다.

애굽을 통과하여 광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구원의 확신이 중요합니다. 거듭남의 확신이 중요합니다. 완전한 사면에 대한 확신이 중요합니다. 우리의 죄가 과거 현재 뿐 아니라 미래 영원까지 속죄가 이루어졌음을 믿어야 합니다. 그 피가 모든 것을 덮었음을 믿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는 바로 왕국, 저주의 땅 애굽에서 나오지 못합니다.

 

열심히 주를 믿고 기도하는 사람들 중에도 완전한 죄사함의 확신이 없는 이들은 아주 많습니다. 사람들에게 완전히 용서받았느냐고 물어보면, 많은 경우 망설이고 주저합니다.

그러한 경우 그들은 언제든지 악령들에게 약탈당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대적기도를 많이 해도 잠간 기분이 즐거워질 수는 있겠지만, 조금 있으면 다시 악령들에게 시달릴 것입니다. 그 피의 완전성, 완전 속죄를 믿지 않으면 누구도 죄에서 해방될 수 없습니다.

죄사함의 확신이 있을 때 죄에서 벗어나며 구원의 확신이 있을 때 구원의 열매를 맺게 됩니다. 오늘날 이 확신을 가진 이들이 많지 않은 것은 몹시 비참한 일입니다.

 

 

주님의 용서는 우리의 행위나 영적 상태에 달려있지 않습니다. 오늘은 기도를 많이 했으니까 용서가 믿어지고, 오늘은 성질부리고 기도도 안했고 상태도 안 좋으니까 용서에 대한 확신이 사라지고.. 이렇게 우리의 기분 따라 상태에 따라 왔다 갔다 하는 것은 신앙의 기초를 주님께 두지 않고 자신과 자신의 경험에 둔 것이기 때문에 언제까지나 흔들릴 수밖에 없습니다.

구원은 사람의 행위나 의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다 똑같습니다. 아브라함이나 다윗이나 욥이나.. 우리나 별로 차이가 없습니다. 그들은 그리 잘난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모형을 위하여 이해와 설명을 위하여 선택되었을 뿐입니다. 성경은 오직 그리스도만을 이야기합니다.

 

구데기 중에서 조금 날씬한 구데기가 있고 똘똘한 구데기가 있겠지만.. 그래 봤자 거기서 거기입니다. 구원과 의는 오직 주님에게서 나옵니다. 구원은 그 의를, 그 사면을 받아들이겠느냐, 믿겠느냐에 달려있는 것입니다. 사형수가 살아나는 것은 대사면을 받아들일 것이냐, 거절할 것이냐에 달려있는 것입니다.

많은 이들이 자기의 죄가 그리스도의 보혈보다 더 중대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잘못이나 악이 십자가의 사역보다 위대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복음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것입니다. 우리의 악이나 잘못은 하나님의 은혜를 제한하지 않습니다. 해답은 믿음에 있는 것이지 깨끗함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잘나고 깨끗해서 구원받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아무도 하나님의 기준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인류 중에 아무도 도달하지 못한 것을 아직도 도달하려고 애쓰는 이들을 보면 안타깝습니다.

우리는 오직 그리스도의 의를 붙들어야 합니다. 거기에서 모든 변화, 생명, 승리가 시작됩니다.

회개해야 천국에 간다는 말씀을 많이 붙듭니다. 그것은 옳은 말씀입니다. 하지만 이해해야 하는 것은 회개에는 두 종류가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는 자기가 자기 인생의 주인이 되어서 자기 맘대로, 세상적인 삶을 살아가던 사람이 이제 그 길을 멈추고, 자기의 길을 버리고 돌아서서 주님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첫 번째 회개이며 근본적인 회개입니다.

 

두 번째 회개는 인생의 방향이 근본적으로 바뀌어져서 주님을 모시고 살아가지만 아직도 남아있는 육적이고 자아적인 잘못들을 날마다 고백하고 씻는 회개입니다.

첫 번째 회개는 구원에 관련된 것이고 두 번째 회개는 교제와 관계 유지를 위한 것입니다. 첫 번째 회개는 구원을 이루고 두 번째 회개는 성화를 이루어갑니다. 두 번째 회개가 완전하지 않고 사소한 잘못을 하였다고 해서 첫 번째 회개로 인한 관계가 단절되고 끝나지 않습니다. 지옥가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마4:17) 고 말씀하셨을 때, 이 회개는 인생의 방향을 주님께로 돌이키는, 근본적으로 바꾸는 회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3장에서 주님이 잡히시는 시간이 가까우신 줄을 아시고 제자들의 발을 씻기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 때 베드로는 너무 송구스러워서 [내 발을 절대로 씻기실 수 없습니다] 하고 거부합니다.

그러자 주님은 [내가 너를 씻어주지 않으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 하고 대답하십니다.

 

베드로는 놀라서 [그렇다면, 발 뿐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어주십시오] 하고 부탁하는데, 이에 대해서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 몸이 깨끗하니라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 여기서 다 깨끗한 것은 아니다.. 라는 것은 자기를 팔 자, 가룟유다는 깨끗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 메시지는 명백합니다. 몸 전체를 씻는 것이 있고 발만 씻는 씻음이 있다는 것입니다. 전자는 첫 번째 회개에 대한 것입니다. 발만 씻는 것은 두 번째 회개에 대한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영접하고 죄사함을 받은 후에 날마다 회개를 해야 합니다. 발을 씻어야 합니다. 그러나 다시 구원을 받을 필요는 없습니다. 한번 목욕을 했으면 다시 목욕할 필요는 없습니다. 구원은 한번만 받으면 됩니다. 구원은 잃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놀랍게도 구원을 위한 회개와 성화를 위한 회개를 구분하지 못하는 이들이 꽤 있습니다. 아주 사소한 죄라도 회개하고 처리하지 않으면 구원받지 못한다는 시각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해입니다.

 

사람이 태어난 후에, 좋은 자녀가 될 수도 있고 부끄러운 자녀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태어난 자녀가 다시 어머니 배속으로 돌아갈 수는 없습니다. 주님은 가룟유다가 애초에 깨끗하지 않다고 하셨습니다. 그는 거듭난 사람이 아닙니다.

 

 

어떤 이들은 주님의 보혈이 과거와 현재까지의 죄는 사하셨지만, 미래의 죄는 사하시지 않았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옳지 않습니다.

[지금, 이 시점까지는 나의 은혜로 사한다. 그러나 앞으로는 너희가 알아서 거룩해라..] 하면 그것을 지킬 사람이 있을 까요? 늪에 빠진 사람이 죽어가는 데, 하늘에서 헬리콥터에서 줄을 내려줍니다. 그래서 그 줄을 타고 올라가는데, 중간쯤 올라가다가 줄을 거두어가 버리고 [나머지는 네가 알아서 올라와라..] 하면 떨어지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요?

 

주님은 [내 말을 듣고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고 말씀하셨고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쫓지 아니하리라](요6:37)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이 사면을 하신다고 해도,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은 사람입니다. 그것을 거절한다면 그는 사면을 얻을 수 없을 것입니다. 어떤 이가 사면을 받은 후에 다시 자신의 자유의지로 그것을 거절한다면, 주님은 자유의지를 억압하시지 않으므로 그것을 막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를 믿고 따른다면, 마귀가 온갖 유혹을 하고 공격을 할 수는 있겠지만, 마귀보다 크신 주의 은혜와 능력으로 우리는 넉넉히 이길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믿어야 합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 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롬8:35-39)

 

 

우리가 의도적으로 주님을 거절하지 않는 한, 주님은 결코 우리를 버리지 않으십니다. 그 어떤 것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신뢰해야 합니다. 두려움은 우리의 안전을 위협하지만, 신뢰는 우리를 안전함에 거하게 합니다.

기독교 역사에는 제한적인 죄사함을 믿는 이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세례를 받으면 그 때까지의 죄만 용서되고 이후의 죄는 사해지지 않는다고 믿는 시대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최대한 세례를 받는 시기를 늦추려고 했습니다. 세례를 받은 후에 다시 죄를 지으면 어떡하나 걱정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기독교를 공인했던 콘스탄틴 황제도 그러한 이들 중의 하나였습니다. 나는 그가 진실한 신자라고 믿지 않지만, 어쨌든 그도 마지막 죽음의 순간에 세례를 받으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만 그 타이밍을 아슬아슬하게 놓쳐서, 그가 죽어갈 때 사제를 불렀지만, 사제가 도착했을 때는 방금 숨이 넘어간 상태였습니다. 사제가 세례를 주고 성찬의 포도주를 부었지만 그 물은 그의 입속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바깥으로 흘러내렸습니다. 현재까지의 죄만 용서된다고 믿으면 이런 식으로 신앙에 대한 두려움이 있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미 믿고 거듭났지만 날마다 항상 깨어있어서 회개를 하지 않으면 지옥에 갈 것이라고 믿는 이들이 의외로 많이 있어서 나는 놀랐습니다. 어떤 이의 간증을 읽은 적이 있었는데, 그는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고 여겼을 때는 엉망으로 살았지만, 사소한 죄로도 지옥에 갈 수 있다고 여기게 되자 날마다 깨어서 회개하게 되었고, 진실한 신앙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세상을 따르지 않고 깨어서 항상 주를 따르고 자신을 반성하고 돌아보는 삶을 사는 것은 아름답고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구원과는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두려움에 근거한 것은 아름다운 열매를 맺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지옥갈 까봐 걱정하는 신앙은 아름답고 행복한 열매를 맺기 어렵습니다. 잠시 각성할 수는 있겠지만, 그 각정은 오래 가지 않으며 후유증이 많이 생깁니다.

 

시험준비를 하는 학생이 잠을 쫓기 위해서 각성제를 마실 수 있습니다. 잠시 잠을 안 자고 깨어있을 수는 있겠지요. 그러나 영원히 잠을 안 잘 수 있을 까요? 조금의 시간이 지나면 더 깊은 잠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종말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던, 구원과 지옥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던.. 그것은 사람을 긴장시키고 죄에서 일시적으로 멀어지게 할 수는 있겠지만, 근원적인 승리를 하게 하지는 못합니다.

 

시험성적이 나쁘게 나오면 채찍으로, 심하게 맞을 것이라는 위협을 받은 학생들은 다 공부를 잘 하게 될까요? 그런 학생도 있지만 오히려 더 심한 눌림이나 무기력에 빠지거나 도피성 중독에 빠지는 이들도 있을 것입니다. 또, 일시적으로 원하는 성적이나 합격을 성취했다고 하더라도, 그 후유증은 적지 않을 것입니다.

이런 쪽은 어떨까요? 이 공부의 아름다움, 즐거움을 교사가 깨닫게 해주는 것입니다. 즐겁게, 행복하게 공부할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주는 것이죠. 공부를 즐기게 해주는 것입니다. 어떤 쪽이 좋은 열매를 맺게 될까요?

 

 

복음전파는 지옥의 공포를 전하는 방식과 천국의 아름다움을 전하는 방식의 두 가지가 있을 것입니다. 아마 일시적으로는 전자가 훨씬 빠른 효과를 보일 것입니다. 말을 잘 듣지 않는 비행 소년을 가장 빨리 제압하는 방법은 폭력과 징벌일 것입니다. 무서워서 꼼짝을 못할 테니까요.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다른 이들에게 영향을 주고 싶을 때 쉽게 위협과 강압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힘으로, 위협을 주어서 사람을 제압하는 것은 가장 쉽게 보입니다.

 

공포는 사람에게 가장 강력하고 즉각적인 동기부여가 됩니다. 사람은 누구나 생존본능이 있기 때문에 자신의 존재가 위협당하면 살아남기 위해서 움직입니다. 아무리 게으른 사람도 불이 나면 달아나지요. 공포와 위협을 가할 때, 그것은 사람을 사로잡을 수 있는 가장 빠르고 효과적인 방법입니다. 그러나, 그 효과가 항구적일까요?

 

부모가 무섭고 폭력적이라고 아이가 변화될까요? 아마 집에서는 얌전하겠지요. 하지만 학교에 가서는 일진이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자기가 당한 만큼, 누군가에게 갚아주겠죠. 공포와 억압은 사람을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 전달방식에 있어서 천국의 아름다움을 전하는 것보다 지옥의 공포를 전하는 것이 훨씬 더 쉬울 것입니다. 지옥에 대한 공포심은, 모든 사람이 죄의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들을 위협하는 것이 어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천국을 전하려면, 천국의 아름다움과 거룩함과 영광과 풍성함을 본인이 경험해야 합니다. 자신이 먹지 않은 것을 전하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사역자들의 설교하는 얼굴을 보면, 대체로 딱딱하거나 굳어있거나 화가 나 있거나 누군가를 비난하거나 하는 모습이어서 그러한 모습으로 천국의 거룩함과 아름다움을 전달하는 것은 쉽지 않을 것입니다.

 

 

두려움에 근거한 신앙은 결코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얼마 동안은 깨어서 죄를 짓지 않고 잘 지내는 것 같지만, 그것은 긴장된 상태이며 누림의 상태가 아닙니다.

신앙이란 곧 주님과의 관계이며 친밀감입니다. 친밀감, 아름다운 사랑의 관계를 통해서 모든 아름다운 열매가 나타납니다. 친밀감은 어떻게 형성될까요? 두려움일까요?

 

아빠와 아주 친하게 지내는 딸이 있습니다. 둘이는 아주 친근하며 친구처럼 장난을 치며 즐겁게 지냅니다. 이 딸은 어릴 때부터 워낙 무섭게 하고 혼이 나면서 자랐을까요? 조금만 잘못해서 매를 맞으면서 자랐을 까요? 그 결과, 아빠의 마음에 합당한, 바른 딸이 되었을까요?

아니면, 어릴 적부터 아빠와 친근하게 장난을 치고 재미있는 시간을 보내며 지냈을까요?

그 답을 아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긴장과 두려움은 친밀감을 만들어내지 못합니다.

 

 

어떤 이가 내게 메일로 문의를 하였습니다. 구원의 확신에 대한 나의 메시지가 잘못되었다고 하면서 고린도전서 9장 27절의 말씀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하는 것입니다.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 (고전9:27)

참 안타깝습니다. 이 분은 정말 바울이 지옥갈 까봐 두려워서 열심히 자신을 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일까요? 성경 한 두 구절을 떼어서 보고 단순하게 결론을 내리지 말고, 먼저 대략적으로 생각해본다면, 사도바울의 삶이 과연 그런 삶이었을까요? 그는 버림받고 지옥가는 것을 두려워해서 열심히 복음을 전하고 자신을 치며 달음질하는 것일까요?

 

사도바울의 삶은 그러한 삶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사역은 그러한 분위기가 이루어진 것이 전혀 아니었습니다. 그는 두려움이 아니라, 그 사랑과 은혜에 감격해서, 매이고 사로잡혀서 움직였던 사람입니다.

사도행전 20장에서 바울이 밀레도에서 장로들을 초청하여 이별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바울이 밀레도에서 사람을 에베소로 보내어 교회 장로들을 청하니 오매 그들에게 말하되 아시아에 들어온 첫날부터 지금까지 내가 항상 여러분 가운데서 어떻게 행하였는지를 여러분도 아는 바니

곧 모든 겸손과 눈물이며 유대인의 간계로 말미암아 당한 시험을 참고 주를 섬긴 것과 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나 거리낌이 없이 여러분에게 전하여 가르치고 유대인과 헬라인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언한 것이라

 

보라 이제 나는 성령에 매여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거기서 무슨 일을 당할는지 알지 못하노라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언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보라 내가 여러분 중에 왕래하며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였으나 이제는 여러분이 다 내 얼굴을 다시 보지 못할 줄 아노라 그러므로 오늘 여러분에게 증언하거니와 모든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내가 깨끗하니 이는 내가 꺼리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다 여러분에게 전하였음이라

 

여러분은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 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그들 가운데 여러분을 감독자로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보살피게 하셨느니라 내가 떠난 후에 사나운 이리가 여러분에게 들어와서 그 양 떼를 아끼지 아니하며 또한 여러분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따르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줄을 내가 아노라

 

그러므로 여러분이 일깨어 내가 삼 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 지금 내가 여러분을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에 부탁하노니 그 말씀이 여러분을 능히 든든히 세우사 거룩하게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 기업이 있게 하시리라

 

내가 아무의 은이나 금이나 의복을 탐하지 아니하였고 여러분이 아는 바와 같이 이 손으로 나와 내 동행들이 쓰는 것을 충당하여 범사에 여러분에게 모본을 보여준 바와 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또 주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

이 말을 한 후 무릎을 꿇고 그 모든 사람들과 함께 기도하니 다 크게 울며 바울의 목을 안고 입을 맞추고 다시 그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 한 말로 말미암아 더욱 근심하고 배에 까지 그를 전송하니라] (행20:17-38)

 

 

이 장엄한 이별의 장면을 묵상하면서 읽다보면 정말 울고 싶어집니다. 그리스도의 복음과 그 은혜, 그 사랑에 함몰되어서 이제 많은 환란과 고통이 기다리고 있음을 뻔히 알면서도, 자신의 목숨을 조금도 귀하게 여기지 않고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눈물로 마지막 이별의 권면을 나누는 바울의 모습.. 그리고 다 같이 헤어짐을 아파하면서 크게 울고 기도하며 전송하는 모습들.. 그것은 오직 주의 사랑에 매여 그 길을 걸어가는 사람의 모습이지, 지옥갈 까봐, 버림받을까봐 두려워하는 사람의 모습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과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가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따를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따르리라

그러나 너는 모든 일에 신중하여 고난을 받으며 전도자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 전제와 같이 내가 벌써 부어지고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웠도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딤후4:1-8)

바울의 삶이 거의 끝나가고 있는, 쓸쓸한 감옥에서의 디모데에게 쓰여진 마지막 편지.. 죽음을 예측하고 있는 그의 마지막 고백은 주를 사랑하고 갈망하여 사모함으로 달려온 거인의 사랑의 고백입니다. 이것은 버려질까 두려워하는 사람의 여정이 아닙니다.

 

 

[우리가 만일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요 정신이 온전하여도 너희를 위한 것이니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 도다] (고후5:13-14)

그리스도의 강권하시는 사랑.. 그 사랑에 사로잡히고 함몰되어 미친 듯이 온 천하를 헤치고 복음을 전하고 고난을 감당하였던 것이 바울의 삶이었습니다. 이것은 두려움에 기인된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앞에서 언급한 고린도 전서 9장 27절을 살펴보겠습니다. 여기서의 버림당함에 대한 두려움의 의미를 이해하려면 전체의 문장, 앞뒤의 문맥을 보아야 합니다. 성경 전체를 보지 않고, 문맥을 보지 않고, 한 단어나 문장 자체에만 주의를 기울인다면 이는 종종 잘못된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흔히 히브리서 6장 5,6절 말씀에 대한 오해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도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나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드러내놓고 욕되게 함이라]

흔히 이것을, 여기서 말하는 타락을.. 교회에 다니다가 안 다니고. 술 마시고 담배피고.. 이런 식으로 하면 구원을 잃는다는 식으로 해석합니다.

 

히브리서는 그리스도의 완전한 속죄, 제사의 완전성을 강력하게 강조하고 가르치는 내용입니다. 율법이나 다른 제사나 다른 방법이 없고, 오직 그리스도의 속죄만이 구원에 있어서 완전하다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그 속죄의 진리에 대해서 깨달은 후에 다시 다른 인간적인 방법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려고 해서는 안 되며 그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대적하고 욕보인다는 내용인 것입니다. 이러한 해석 상의 오류도 전체 안에서 보지 않고 부분만을 따로 떼어서 해석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버림받을까봐 두려워한다는 고전9장27절의 말씀이 어떤 문맥에서 나오는지 보기 위해서 본문을 조금만 살펴보겠습니다.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릴지라도 오직 상을 받는 사람은 한 사람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상을 받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그들은 썩을 승리자의 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그러므로 나는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 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 같이 아니하며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 (고전9:24-27)

 

 

먼저 24절에 [운동장에서 달음질 하는 자들이 다 달릴지라도 오직 상을 받는 사람은 한 사람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 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달음질과 상에 대한 언급이 나오는 것입니다. 상을 받기 위해서 열심히 달음질하라는 것이지요.

 

26절은 상을 받는 것, 1등을 하는 것을 [이기는 것] 이라고 표현합니다.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그들은 썩을 승리자의 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니라]

이기는 것, 1등을 하려는 것은 면류관을 얻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세상의 면류관을 얻는 것에도 이렇게 자신을 치며 모든 일에 절제하는데, 우리도 상을 받기 위하여, 이기기 위하여 세상 사람보다 더 열심을 내야하지 않겠느냐며, 세상 사람이 상을 위하여 절제하고 애쓰는 것처럼 나도 열심히 달음질하겠고 자신을 복종시키고 치겠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27절의 말씀은 24절부터 이어지는 말씀의 결론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버림당할까 두려워함이 구원에 대한 메시지일까요? 전혀 아닙니다. 1등을, 면류관을 원하는 사람이 절제하고 다투는 것처럼 나도 절제하고 최선을 다하겠다는 것인데, 이것이 어떻게 구원에 대한 메시지가 되겠습니까? 이것은 구원에 대한 메시지가 아니고 상급에 대한 메시지입니다.

 

만일 구원에 대한 메시지라면 1등을 안하면 다 지옥간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버림받지 않을까 두려워한다는 것은 문맥 속에서 보면 상을 얻지 못하고 실패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한다는 것인데 그러면, 실패해서 1등을 못하는 이들은 다 지옥간다고 하면 그게 말이 되겠습니까..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애써도 1등을 하는 사람은 한 사람 뿐인데, 일등을 위해서.. 이기기 위해서 애쓸 수도 있고 꿈을 가질 수도 있지만.. 거기에 실패하면 지옥이고 버림받는다.. 이러면 이게 말이 되겠습니까..

 

 

이 본문은 구원에 대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상급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상은 사역의 결과이지 구원과 관련된 것이 아닙니다. 구원에는 차이가 없지만 상급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구원을 말하는 말씀에서는 일찍 나와서 일하는 사람이나 늦게 나와서 일하는 사람이나 같은 한 데나리온을 받습니다. (마20:1-14) 이것은 구원의 문제입니다. 그러나 상급의 문제는 다릅니다. 어떤 이는 다섯 고을 권세를, 어떤 이는 열 고을 권세를 받습니다.(눅19:11-26)

 

구원과 상급은 다릅니다. 바울이 애쓴 것은 주의 사역을 위하여 최선을 다한 것으로서 이는 상급과 관련된 것이며, 구원에 관련된 것이 아닙니다. 바울의 수고는 구원을 잃을 것에 대한 두려움은 결코 아닙니다. 주님은 종이 열심히 최선을 다해서 일을 했지만 결과가 별로라고 해서 지옥으로 보내시는 분이 아닙니다.

 

 

위의 성경 구절에 대한 질문을 나에게 했던 이는 어떤 많이 알려진 사역자의 저서 중의 영적 체험에 대한 글을 같이 보내며 구원을 잃어버릴 수 있음을 입증하려고 했습니다. 위의 말씀의 해석에 대해서는 이미 이야기했고, 이 질문에 대해서 답하자면, 나는 솔직히 말해서.. 사람들의 영적 체험들, 환상들, 영계 체험에 대한 이야기를 그다지 신뢰하지 않습니다.

 

나는 고전의 글들을 좋아합니다. 오래된 고전들, 청교도 시대의 하나님의 사람들의 글들, 잔느 귀용이나, 바실레이아 슐링크나 리즈 하월즈 같은 분의 글을 읽고 많은 도전을 받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실제적으로 주님을 가까이 누리고 경험한 열매들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며 삶 가운데 아름다움과 향취가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항상 사람들의 삶, 인격, 그들의 열매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외적으로 나타나는 능력이나 현상에 대해서는 그다지 관심이 없습니다.

 

 

나는 최근의 사도라고 알려진 여러 영성인들에 대해서는 그다지 신뢰감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특히 영계의 체험에 대해서는 잘 믿지 않습니다. 영계의 체험담 중에서 더러 신뢰가 느껴지고 참고가 된다고 느껴지는 글들도 있지만, 대다수의 영계체험은 별로 신뢰하지 않는 편입니다.

 

나사로와 같이 있던 부자는 아브라함에게 부탁하기를 나사로가 죽은 자 중에서 살아나서 복음을 전하면 자기 형제들이 믿을 것이니 보내달라고 하였으나 그의 요구는 거절되었습니다. 성경을 듣고 믿지 않는 자가 체험이야기를 듣고 믿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성경에서 거절된 영계의 체험에 대해서 왜 사람들이 신뢰하는지, 나는 잘 이해가 안 갑니다. 

 

묘한 환상들을 보고, 그리고 해석하고, 의미를 부여하고.. 그런 것에 대해서 나는 그다지 신뢰하지 않습니다. 자칭 사도라고 하는 이들의 집회를 영상으로 여러 번 본 적이 있는데, 다양한 육신적인 체험, 현상들, 집회 가운데 낄낄거리며 이상하게 웃고 발작하는 모습들을 보면서 소름이 끼치고 참 불편한 느낌이었습니다. 이들은 그러한 현상들을 성령의 기름부음이라고 가르치지만 나는 그러한 것들에 대해서 별로 신뢰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성령의 역사는 다양하며, 특히 악령들을 축출하는 과정에는 소란스러움과 누추한 모습들이 나타납니다. 그것은 영적 전쟁의 과정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영적 투쟁과 관련되지 않은 일반적인 성령의 역사는 아름답고 거룩하고 사랑스럽습니다. 그리고, 주님께 속한 사람들은 삶과 인격에 아름다움과 거룩함과 천국의 향취가 나타납니다.

 

 

그러나 외적인 현상이나 체험을 강조하는 이들의 삶에서는 여러 잘못된 열매들, 일탈된 행위들이 흔히 나타납니다. 나는 다양한 영적 현상을 이해하지만, 전폭적으로 받아들이는 편보다는 조심시키는 쪽에 속하며 분별의 기준과 근거에 대해서 많이 이야기하는 편입니다. 그 중요한 기준은, 오직 그리스도가 나타나는가, 아니면 자아가 나타나는가.. 하는 것입니다. 천국에 속한 은혜에는 아름다움과 거룩함과 오직 그리스도, 하나님께 대한 영광돌림이 나타납니다. 

 

영적 현상에 대한 신빙성에 대해서 나는 조심스러운 입장이며, 그러므로 나는 사도라거나, 영성인이라고 알려진 이들의 영계체험에 근거해서 어떤 이들이 천국에 가고 못가는 조건에 대해서 말하는 것에 그다지 의미를 둘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구원에는 여러 차원이 있습니다. 아주 낮은 차원도 있습니다. 고전3장은 낮은 수준의 구원을 보여줍니다.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내가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터를 닦아 두매 다른 이가 그 위에 세우나 그러나 각각 어떻게 그 위에 세울까를 조심할지니라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

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 각 사람의 공적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적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적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라 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적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누구든지 그 공적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신은 구원을 받되 불 가운데서 받은 것 같으리라]

(고전3:10-15)

 

 

이것은 구원받은 상태에 차이가 있음을 보여줍니다. 각 사람이 사역을 하지만, 그 사역의 열매는 다 다릅니다. 불의 시험이 올 때 금이나 은이나 보석은 무사할 것입니다. 그러나 나무나 풀이나 짚은 터버릴 것입니다.

금은보석은 다 땅속에 숨겨진 것입니다. 내면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나무나 풀이나 짚은 다 표면에 보이고 나타나는 것입니다. 외적인 경험, 외적인 축복, 외적인 현상이나 행위에 근거한 신앙은 불이 올 때 타버리며, 유지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사람의 내면, 영에 심겨진 실체는 흔들리지 않고 타지 않고 환란 가운데서도 열매를 맺습니다.

 

 

어디에 집을 짓던 간에 신앙에는 반드시 시험이 오게 되어있습니다. 그 때 어떤 집은 무너지고 어떤 집은 무너지지 않습니다. 반석위에 지은 집은 버티지만, 모래 위에 지은 집은 무너집니다. 10절은 그 반석, 안전한 터가 오직 그리스도이심을 말합니다. 그리스도에게 속하지 않은 인간적인 애씀이나 열정은 열매를 맺을 수 없으며 다 쓰러지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본문은 그 공적이 불타도 구원을 잃는 것은 아니라고 합니다. 구원은 받지만 불 가운데서 받은 것과 같다고 합니다.

 

 

구원은 받지만 온전하지는 않은 상태.. 그것은 어떠한 상태일까요? 그리고 그 결과는 어떻게 될까요? 그런데 바로 이어서 16, 17절에 무서운 경고가 있습니다. 이것은 그 질문의 댑에 대한 암시를 주고 있습니다.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 (고전3:16-17)

고린도는 항구도시라는 특성과 함께 음란죄가 성행하는 곳이었습니다. 고린도교회 사람들도 이러한 특성에서 자유롭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 바울은 말합니다.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신다. 성전을 더럽히지 말라. 그러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실 수 있다.]

 

성전은 무엇일까요? 우리 몸을 말합니다. 우리 안에 성령이 거하시기 때문에 우리 몸은 하나님의 성전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전을 더럽히는 것은 어떤 행위일까요? 이 질문에 대하여 명백한 대답이 있습니다.

[너희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내가 그리스도의 지체를 가지고 창녀의 지체를 만들겠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창녀와 합하는 자는 그와 한 몸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일렀으되 둘이 한 육체가 된다 하셨나니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니라

 

음행을 피하라 사람이 범하는 죄마다 몸 밖에 있거니와 음행하는 자는 자기 몸에 죄를 범하느니라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고전6:15-20)

우리의 몸은 그리스도의 지체입니다. 창기와 합하는 자는 둘이 한 육체이며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믿는 이가 음행을 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성령이 거하시는 성전을 더럽힌 것입니다.

그러므로 위의 질문,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는 죄는 어떤 죄일까요? 하는 질문에 대한 답은 명확합니다. 그것은 음행, 음란죄입니다.

 

우리가 음행을 할 때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을 더럽히고 성전을 더럽히는 것입니다. 그 결과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신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교회에 음행이 가득할 때, 이것은 멸망의 시작입니다. 소돔과 고모라도, 봄베이도.. 많은 문화들이 동성애 등 각종 음란이 성행하면 이는 멸망이 가까워지고 있는 것입니다.

음란을 행하므로 성전을 더럽히는 사람을 멸하신 다는 말씀은 단순한 경고가 아닙니다. 그 구체적인 사례가 고린도 전서 5장에 나옵니다.

 

 

[너희 중에 심지어 음행이 있다 함을 들으니 그런 음행은 이방인 중에서도 없는 것이라 누가 그 아버지의 아내를 취하였다 하는 도다 그리하고도 너희가 오히려 교만하여져서 어찌하여 통한히 여기지 아니하고 그 일 행한 자를 너희 중에서 쫓아내지 아니하였느냐

내가 실로 몸으로는 떠나 있으나 영으로는 함께 있어서 거기 있는 것 같이 이런 일 행한 자를 이미 판단하였노라 주 예수의 이름으로 너희가 내 영과 함께 모여서 우리 주 예수의 능력으로 이런 자를 사탄에게 내주었으니 이는 육신은 멸하고 영은 주 예수의 날에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라] (고전5:1-5)

 

 

고린도 교회의 성도 중에 이방인보다도 못한, 더 심한 성적 범죄가 있었습니다. 누가 그 아버지의 아내를 취하였다는 것입니다. 물론 친 어머니는 아니겠지요. 그렇다고 해도 엄청난 범죄입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게 경고하기를, 왜 그런 사람을 쫓아내지 않느냐고 꾸짖고, 나중에라도 그런 자를 사탄에게 내어주었으니 다행이라고 합니다.

 

사탄에게 내어주었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일까요? 문맥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쓴 편지에 음행하는 자들을 사귀지 말라 하였거니와 이 말은 이 세상의 음행하는 자들이나 탐하는 자들이나 속여 빼앗는 자들이나 우상 숭배하는 자들을 도무지 사귀지 말라 하는 것이 아니니 만일 그리하려면 너희가 세상 밖으로 나가야 할 것이라

 

이제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만일 어떤 형제라 일컫는 자가 음행하거나 탐욕을 부리거나 우상 숭배를 하거나 모욕하거나 술 취하거나 속여 빼앗거든 사귀지도 말고 그런 자와는 함께 먹지도 말라 함이라

밖에 있는 사람들을 판단하는 것이야 내게 무슨 상관이 있으리요마는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야 너희가 판단하지 아니하랴 밖에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심판하시려니와 이 악한 사람은 너희 중에서 내쫓으라] (고전5:9-13)

 

 

세상에야 음란한 사람들이 가득하고, 그것이야 어쩔 수 없지만, 교회 안에도 형제라고 하는 자가 음행을 한다면 그런 자와는 함께 먹지도 말고 내어 쫓으라고 합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도 음란에 대해서 관대한 경향이 있는데, 이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성도든 사역자든 음행과 관련된 이들은 쫓아내야 합니다.

 

사역자에게 그런 일이 있다면 사역을 맡겨서는 안 됩니다. 충분히 반성하고 회개하고 일정 기간이 지나면 사역자의 성찬식을 거쳐서 회복될 수 있겠지만, 그것을 가벼이 여긴다면 그를 교회의 교제권에 두어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고전5장5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런 자를 사탄에게 내주었으니 이는 육신은 멸하고 영은 주 예수의 날에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라]

그 아비의 아내를 범한 정도의 심한 죄이므로 사탄에게 내어주었다고 합니다. 이것은 곧 교회에서 쫓아내었다는 말입니다. 오늘날에는 교회에 여러 문제가 있거나 개인 사정이 있어서 다른 교회로 옮길 수 있습니다.

 

또한 교회의 징계나 권고를 거절해서 쫓겨나는 일이 있다고 해도 다른 교회에서 여전히 신앙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초대교회에서 쫓겨난다는 것은 훨씬 더 문제가 심각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의 범죄함이 너무 크기 때문에,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지기 때문에] (고전5:6) 쫓아내는 것이 옳다고 합니다.

그리고 나서 그 쫓아버린 사람의 영원한 미래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를 사탄에게 내어주었다. 그리고 그의 육체는 죽었다. 그러나 그의 육체는 멸망했을지라도, 나중에 그의 영의 주 예수의 날에 구원을 받게 될 것이다] 

  

이 메시지는 선명합니다. 구원을 받은 사람이 심각한 죄를 지었다고 해서 그 구원이 취소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몸 안의 범죄인 음행처럼 심각한 죄일 경우에, 하나님께서 그의 육체를 멸하실 수 있습니다. 그는 구원을 잃어버리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는 일할 기회를 잃어버리게 됩니다.

주를 위하여 일을 하는 것은 얼마나 놀랍고 영광스러운 일인지 모릅니다. 주의 이름으로 소자에게 냉수 한 컵을 주어도.. 그는 상을 잃지 않습니다. 내가 주를 믿는 사람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에게 주의 이름을 위하여 친절한 미소로 대할 때, 거기에는 상급이 있습니다. 그것은 놀라운 영광이며 특권입니다. 우리의 삶은 주를 섬기기 위한 것입니다.

 

반드시 해외 선교를 해야 섬기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모든 여건에서 주를 섬길 수 있습니다. 병상에서 죽어가면서도 주를 섬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심한 죄를 지으면 주를 위하여 일하는, 섬기는 그 기회, 특권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것은 엄청난 비극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구원을 잃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흔히 구원을 행위와 연관 지어서 생각하기 때문에 사람을 외형으로 판단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외적으로 경건하고 성실하며 교회 생활에 충실하면 거듭나고 구원받은 사람이며, 외적으로 불성실하고 삶이나 성품이나 여러 여건도 보잘 것이 없다면 믿음이 부족하거나 구원받지 못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주님께서 보신 관점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분은 세리와 창기가 구원에 가깝다고 평가하셨습니다. 그리고 많은 이들에게 존경받는 종교지도자들에게 박한 평가를 내리셨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외적으로는 엉망인 사람이 오히려 거듭난 사람일수 있고, 외적으로는 아주 경건하고 종교적이고 성실한 사람이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조심하고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기준은 사람의 기준과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은 엉망으로 보이지만, 막상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거듭난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아주 신앙이 좋아 보이지만, 거듭나지 않은 사람일수도 있습니다. 거듭남의 기준은 내적인 것이며 내적 증거에서 입증되는 것이지 외적인 종교행위나 성품과는 직접 관련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성품은 구원의 문제가 아니라 성숙의 문제입니다.

아주 겸손하고 온유하고 사랑이 가득하지만 거듭나지 않고, 주를 별로 갈망하지 않는 사람이 있고, 아직 많은 부분이 거칠고 모가 나 있지만 거듭나고 주를 갈망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나는 오늘날 거듭남에 대한 오해가 많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이들은 구원에 대해서 너무나 쉽게 가르치기 때문에 안심하고 있다가 지옥에 가는 성도들이 많다고 말합니다. 그 말은 어떤 면에서 진리입니다. 또한 어떤 면에서 옳지 않습니다.

 

거듭남은 결코 간단한 것이 아닙니다. 평생을 교회 다니고 몇 대째 신앙 생활을 하고도 거듭나지 않은 이들이 있을 수 있고, 짧은 시간에 거듭남과 회심을 경험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거듭남이 간단하지 않다는 면에서 그 말은 옳습니다.

 

그러나 구원을 잃지 않는다고 가르쳐서, 안심하고 지옥에 간다는 말은 틀렸습니다. 진정 거듭난 사람은 그렇게 자기 멋대로, 제 맘대로 사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거듭남은 하늘의 새생명을 얻는 것인데, 새 생명에는 새 감각이 있으며 감각이 있는 이들은 다시는 옛 사람을 살 수가 없습니다. 전혀 없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거의 불가능합니다.

 

 

시체는 병상에 하루 종일 누워 있을 수 있습니다. 생명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시체가 살아났다면 가만히 누워서 몇 날을 보내는 것이 가능할까요? 불가능합니다. 그는 움직입니다.

사람이 죽었을 때는 그의 몸이 관 속에 있어도 가만히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살아났다면, 그는 관 속에서 살려달라고, 나를 꺼내달라고 소리치며 안에서 관을 두들길 것입니다.

시체는 며칠 동안 먹을 것을 주지 않아도 가만히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생명이 있는 살아있는 사람은 아주 작은, 갓 태어난 아기라도 해도.. 하루만 음식을 주지 않으면 난리가 날 것입니다. 생명이 있을 때, 그것은 역사합니다. 가만히 있을 수 없습니다.

 

거듭나서 하늘의 생명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더 이상 옛 사람에 속한 삶을 살 수 없습니다.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거듭나지 않았기 때문에 함부로 제멋대로 사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구원을 받은 적이 없으며 잃을 수도 없습니다. 받지도 않은 것을 어떻게 잃을 수 있겠습니까.

거듭남은 사람의 행위나 의에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거룩과 공의를 만족시킬 의는 그리스도의 의 밖에 없습니다. 성경 전체가 인간의 실패와 타락, 그리스도의 온전함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구약의 중심은 율법과 선지자인데, 율법도, 선지자도.. 행위를 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몽학선생일 뿐이며 근본적으로는 그리스도를 가리키며 그리스도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성경의 중심이며 하나님의 지혜이며 모든 것입니다.

 

 

나는 오늘날 거듭난 신자들이 그리 많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거듭남이 어려워서가 아니라 바르게 교육받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대부분 이러한 문제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대체로, 교회에 열심히 다니고, 봉사하고. 헌금하고. 하면 거듭났다고 생각합니다. 거듭난 증거가 무엇인지, 거듭나기 전후의 차이나 변화가 무엇인지, 열매가 무엇인지 물으면 명확하게 대답하는 사람을 찾기가 어렵습니다.

 

 

구원에 대해서 배운다고 해도.. 구원, 거듭남을 쉽게 여기는 것은 아마 너무 쉽게 거듭남에 대한 선언을 받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선교 단체 등에서 4영리와 같이 간단한 전도지로 피전도자에게 복음에 대해서 간단하게 설명한 후에 예수님을 영접하라고 요청하고 상대방이 하라는 대로 한다면 바로 [당신은 거듭났고,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하고 선언해줍니다.

 

그것은 분명한 사실일까요? 그것은 부도수표일 가능성이 아주 많습니다. 나는 오늘날 많은 이들이 분명한 내적 증거도 없이 이런 식으로 세뇌된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영혼의 성장에 많은 문제를 일으킬 수 있습니다. 구원의 확신에 대한 두려움을 심어주는 것도 문제지만, 근거없은 확신을 심어주는 것도 역시 문제입니다.  

 

사람들은 흔히 전도 집회에 데리고 와서 전도 설교를 들은 후에 그 자리에서 일어나게 하고 예수님을 영접하는 기도를 따라 하도록 시키기도 합니다. 그리고 시키는 대로 한 사람에게 구원받았다고, 하나님의 자녀라고 선언하기도 합니다.

 

그것은 확실한 보장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씨를 뿌린다고 해서 모든 씨앗이 다 열매맺는 것은 아닙니다. 새들이 먹어 버릴 수도 있고 잠시 괜찮다가 말라버릴 수도 있습니다.

구원의 약속에 대한 성경 귀절을 여러 개 암송하게 하고 구원받았다고 확인시켜주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것은 확실합니까? 나는 확실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구원받지 않고도 성경의 모든 이야기에 얼마든지 동의할 수 있습니다. 일시적인 기분이나 감정으로 얼마든지 영접기도도 할 수 있고 통곡할 수도 있습니다. 감동을 느낄 수도 있고 거룩한 느낌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종교적인 열심을 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것들이 즉각적으로 구원을 보장해주지 않습니다. 그것들이 거듭남의 표징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종교성을 가지고 있지만 그 종교성이 열정적으로 나타날 수 있지만 그것이 구원받은 상태인 것을 입증하는 것은 아닙니다. 확인을 위해서는 좀 더 시간이 필요합니다.

 

 

구원사상은 인간 사상에 절대적으로 부딪치는 사상입니다. 평생 수 십년간 오래 접하고 세뇌되어온 철학이 공짜는 없다는 사상입니다. 은혜라는 것.. 그의 피로 인한 구속.. 완전한 사면.. 이것은 사람의 의식 안에 쉽게 뿌리내릴 수 있는 사상이 아닙니다.

 

이것은 한 달, 두 달 배워서 의식체계가 바뀔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의식체계가 온전히 변화되어야 구원이라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구원의 체계, 사상을 이해하고 가르치고 배우는 것이 그리 간단하지만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속에 대해서, 성경 전체를 배우고 구속사에 대해 배우며 성경의 모든 말씀이 거듭 거듭 은혜에 대해서, 피에 대해서 구속에 대해서 말하고 있음을 충분히 배워야 합니다.

 

그러는 과정에서 어느 순간 하나님의 은혜로 빛이 부어지고 생명의 잉태가 시작되고 탄생됩니다. 어느 순간 많은 것들이 깨달아지고 열리기 시작합니다. 이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역사이며 은헤입니다.

 

 

내가 느끼기에는 구원의 확신을 가르치는 많은 전도자들, 간사들도 확신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많은 인도자들이 죄책감을 가지고 괴로워하며 승리의 삶을 살지 못하고 고통스러워합니다. 그들 자신도 완전한 용서와 확신이 없으므로 자책에 눌려있지만, 그들에게 배우는 이들도 같이 눌리게 됩니다.

많은 이들이 부분적으로 개념을 이해하지만 그 완전한 용서가 가져다주는 평강의 물결, 영광의 경험에 대해서 알지 못합니다. 영의 실제를 모르고 개념과 이론을 붙들고 있으면 거기에는 실제의 해방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런 식으로 어설픈 구원의 확신을 가르치고 배우고.. 충분한 변화나 자유함이나 열매도 없이 살아가다보면, 나중에는 [이러다가 구원을 잃는 것은 아닐까?] 걱정하고 사로잡히게 됩니다. 하지만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구원을 받지 못한 사람은 잃어버릴까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또한 구원을 받았다면 역시 잃어버려질 수 없습니다.

 

누군가 우리에게 귀중한 선물을 주었습니다. 결혼 선물이라고 진귀한 금시계를 주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언제 빼앗아갈지 모릅니다. 그렇다면 아무도 그 금시계를 마음 놓고 차지 못할 것입니다.

나의 여김으로는 오늘날 거듭난 이들이 많지 않습니다. 거듭났다면 반드시 그에 속한 열매를 맺게 됩니다. 강아지는 강아지의 생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고양이는 고양이의 생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생명을 가지고 있으므로 그 행위를 합니다. 거듭남은 하늘의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타고난 땅의 생명, 아담의 생명이 아니라.. 하늘의 생명, 그리스도의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반드시 새생명의 역사, 열매가 나타납니다. 하늘의 생명, 그리스도의 생명을 얻은 자에게서 하늘의 생명, 그리스도의 생명이 나타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생명이 나타나면 살아있는 것이고 나타나지 않으면 죽은 것입니다. 나무에서 꽃이 핀다면 그 나무는 살아있는 것이고 몇 년이 지나도, 몇 번의 봄이 지나도 아무 소식이 없으면 그 나무는 죽은 것입니다.

어떤 행위를 해야 구원을 받는다.. 이런 개념이 아닙니다. 구원을 받은 사람은 자연히 생명이 역사하므로 변화와 행위가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없다면 그 사람은 거듭난 사람이 아닙니다.

그 사람은 새생명에 대해서 배워야 하며 거듭남에 대해서 배워야 합니다. 구속에 대해서, 사면에 대해서, 회심에 대해서 배워야 합니다.

 

 

가만히 있는 채로 세월이 많이 흐른다고 생명이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봉사를 많이 하고 헌금을 많이 하고 교회에서 지위가 높아진다고 거듭나지 않습니다.

나는 사역자들 중에서도 거듭나지 않은 이들이 많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대형교회 사역자라면 그럴 가능성어 더 높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진정 거듭난 사역자는 대형교회나 대형사역을 하기가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거듭나고 내면의 영이 일어나 그 지배를 받게 되면 자기 마음대로 사역하는 것이 힘이 듭니다. 오늘날 교회에 가득한 세상철학, 인간적인 방법의 마케팅.. 이런 것들이 고통스럽게 되고 불가능해집니다. 그런 사역들은 거듭나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거듭나고 영이 깨어날수록 이런 짓을 하면 속이 답답하고 죽을 것 같아서 하기 어렵습니다.

 

거듭나고 하늘의 생명이 가득해진다면 교회가 커진다든지, 물질적으로 부유해진다든지.. 세상에서 성공한다든지.. 남들이 알아준다든지.. 이런 것들에 대한 관심들이 점점 사라지게 됩니다. 자아적인 만족, 혈기, 육적인 욕망.. 이런 부분들이 점점 희미해지게 됩니다. 거듭나고 성장할수록 주님의 임재와 마음에 가까우며 주님의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것을 구하고 찾게 됩니다. 세상이나 자신에 대한 관심을 점점 잃어버리게 됩니다.

 

 

애굽에서 이루어지는 것은 칭의의 상태입니다. 의로운 상태가 아니고, 의롭다하심을 받은 상태입니다. 이때는 갓 태어난 아기에 불과하므로 아직 미숙한 상태입니다. 아직 실제적인 죄에서의 승리가 이루어지지는 않습니다. 성숙과 성화는 광야의 다양한 훈련과 경험을 통하여 구체적으로 점진적으로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거듭남은 그러한 변화가 시작되는 시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교회에서 거듭남의 상태는 많지 않습니다. 미숙하나마 생명을 가지고 있는 이들이 그리 많지 않습니다. 사역에 있어서도 그렇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역들, 신앙의 이름을 쓰고 있는 것이 기독교와 성경과 아무 상관없는 것들이 많습니다.

성경을 부분적으로 몇 개의 문장이나 단어를 끄집어내어서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성경은 반드시 나무를 보지 말고 숲을 보아야 합니다. 전체를 보고 중심을 보아야 합니다. 부분적으로 완벽하게 해석하지 못하고 틀릴 수는 있지만 전체적인 중심은 확고해야 합니다.

 

 

성경의 중심은 그리스도이며 십자가이며 보혈입니다. 성공이니 형통이니 하는 이야기들은 사람의 욕망을 위하여 자기 마음대로 몇 군데에서 짜깁기를 해서 사용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이상하고 신비해 보이는 영적 현상을 좇다가 악한 영들에게 미혹되는 것도 이러한 중심이 분명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영원한 멸망에 빠질 수 있는 인간의 죄의 문제를 다루고 거듭남, 새생명의 탄생에 대해서 다루고 영원한 생명, 하늘의 생명, 하나님과의 관계회복을 이야기하는 책이지 이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사는 것을 가르치기 위한 책이 아닙니다.

 

 

바르게 전체 안에서 성경을 본다면 삼박자 구원이나 사차원의 영성이나.. 긍정의 힘이나. 적극적인 사고방식이나.. 그런 이야기가 나올 수 없습니다. 그것은 기독교와 예수와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성경을 그런 식으로 보고 배우고 있으면 거듭날 리가 만무합니다.

 

어떤 유명한 사역자의 이야기에 이런 것이 있었습니다. 천국과 지옥을 열심히 전해도 도무지 부흥이 안 되고, 어떤 피전도자는 말하기를, 내가 지금 살고 있는 곳이 지옥인데, 먹고 살기 힘들어죽겠는데.. 무슨 놈의 천국 지옥이냐고.. 이 사역자는 크게 깨닫고 그때부터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주시는 하나님을 전했고 그러면서 부흥이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아마, 그것은 부흥일 수는 있겠지만 기독교의 부흥이기 보다는 욕망의 종교의 부흥일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른다고 해서 그 하나님이 다 성경의 하나님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오늘날 많은 신자들이 바알을 믿고 돈을 섬기면서도 입으로는 주를 부르기 때문에 자신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여깁니다. 그러나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나를 불러 주여 주여 하면서도 어찌하여 내가 말하는 것을 행하지 아니하느냐] (눅6:46)

 

 

거듭났다면, 그렇게 되기가 어렵습니다. 거듭나서 하늘의 영, 하늘의 생명을 받은 사람은 더 이상 그렇게 사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여태까지는 그렇게 살았을 지라도.. 거룩한 영을 받은 후에는 그 영이 내면에서 역사하여 더 이상 그러한 삶을 살지 못하도록 합니다. 그것이 거듭남입니다.

오늘날 열매로 보면 거듭난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많은 자칭 신자들이 세상적인 가치관, 자아적, 욕망적 가치관을 가지고 있으며 세상 사람과 별로 다르지 않은 가치관을 가지고 삽니다. 나는 그들이 과연 거듭났는지, 구원받았는지 의문스럽습니다. 이런 이들이 구원을 잃고 말고 할 것이 있겠습니까? 구원을 받은 적이 없는데 말입니다.

 

거듭남이 있고 하늘의 생명이 있으면 거기에는 예수의 생명이 나타납니다. 예수의 향취가 나타나고 천국의 향기가 나타납니다. 거기에는 기쁨이 있고 영광이 있고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죄에서의 해방이 있고 거룩함이 있고 충만함, 평강의 물결이 있습니다. 거기에는 잘난 척이나 거드름이나 혈기나 미움이나 분노가 없습니다. 그러한 것들은 다 아담에게서 나오는 것입니다.

 

거듭남이 모든 면에서 온전함의 상태를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거듭나고도 사람은 여전히 실수하고 넘어집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의 안에서 생명의 역사, 흐름이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예수에 대한 갈망, 하나님 나리에 대한 갈망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사람에 따라 분량의 차이가 있지만, 분명한 것은 그러한 변화들이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생명이 있는 곳에는 열매가 있습니다. 만약 그러한 열매가 전혀 없다면 구원의 진리에 대해서 다시 점검해야 합니다.

 

 

거듭남에 대해서, 구원의 과정에 대해서 다음 기회에 좀 더 자세하게 책으로 쓸 기회가 올 것입니다. 여기에서는 간단하게 과정을 설명해보기로 하겠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약속의 땅을 버리고 애굽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이것은 이미 오래 전에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창15:13) 기근으로 인하여 어쩔 수 없이 야곱은 수하의 모든 사람들을 데리고 애굽으로 들어가는데, 이것은 첫 사람 아담이 스스로 선악과를 선택하고 하나님을 떠나 마귀의 수하로 들어간 결과로서, 온 인류가 마귀에게 속하게 되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영적으로 보면 사람은 누구나 태어날 때 애굽에서 태어납니다. 특별히 구원을 받고 애굽에서 나오는 출애굽의 사건이 없는 한, 누구나 다 지옥으로 갈 수 박에 없는 상태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사람은 죄를 지어서 죄인이 아니라 죄인으로 태어나기 때문에 죄를 짓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애굽에서 태어나서 애굽의 왕인 바로의 지배를 받고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구원이란, 바로 애굽에서 벗어나고 애굽의 왕, 세상의 왕인 바로에게서 벗어나는 과정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벗어나는 과정은 곧 성도가 복음을 받고 구원받는 과정이며, 애굽에서는 나왔지만 아직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헤매는 과정은 거듭나기는 하였지만, 아직 애굽적이고 세상적이고 자아적이고 육적인 가치관들이 처리되고 훈련되는 과정입니다.

 

그리고 가나안의 삶은 사후의 천국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적이고 영적인 신자, 주님을 실제로 맛보고 누리는 신자로서 자기 안에 이루어진 헤븐, 하나님의 왕국을 세상에 확산시키고 공급하는 정복의 삶을 의미합니다.

 

가나안이 사후의 천국을 의미한다면 가나안 7부족과의 전쟁은 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사후의 천국에서 마귀와 전쟁을 한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아직 애굽에서 살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은 구원받고 거듭난 것이 아닙니다. 거듭남이란 애굽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왕인 바로에게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거듭남이란, 육으로, 땅에서 태어난 삶이 또 하나의 삶, 영으로.. 하늘의 생명을 얻어 태어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구원의 과정이란 출애굽의 여정과 같은 것입니다.

 

 

애굽 여정의 첫 번째 시기가 있습니다. 이때는 이스라엘 백성이 바로의 환대를 받으며 잘 나가고 있을 때입니다. 원래 이스라엘 백성은 잠시 기근만 피하고 나면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애굽의 문화나 대접이 너무 좋아서였는지, 아무튼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고 계속 애굽에 머무르게 됩니다. 그 기간이 장장 430년이나 됩니다.

 

이 애굽의 첫 번째 단계는 아직 구원이 머나먼 상태입니다. 이 때 아직까지는 바로, 마귀가 이스라엘을 괴롭히지 않고 잘해주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환경적으로 모든 것들이 잘 풀려나가는 상태입니다. 애굽에서 나가고 싶은 마음이 전혀 들지 않는 상태입니다.

사람들은 이 때 그리스도를 전혀 개인적으로 알 수 없습니다. 세상사는 것이 마냥 재미가 있는데, 왜 신앙생활을 하고 기도를 하고 해야하는 지 이해가 안갑니다.

 

 

물론 이 애굽 초기 단계에 있는 사람이라고 해서 신앙생활을 전혀 하지 않는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영적으로는 애굽 초기 단계이지만 신앙생활을 하는 이들이 교회에 아주 많이 있습니다.

환경적으로 모태신앙이기 때문에 교회에서 열심히 봉사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습니다. 아버지가 목회자이고 자녀가 목회를 하기를 강력하게 원하기 때문에 부모의 뜻을 따라서 신학을 하고 목회를 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습니다. 아무튼 외적으로는 성실한 신앙인의 자세를 가지고 있는 사람도 얼마든지 내적으로는 애굽 초기의 상태에 있을 수 있습니다.

 

이들은 외적으로는 성실하고 모범적인 모습을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면적으로는, 근본적으로 신앙이나, 주님을 알아가는 것이나, 하늘나라에 대한 갈망이나 영혼의 내적인 갈망이나.. 이런 면에 대해서는 거의 관심이 없습니다. 그저 문화적으로, 교양적으로 신앙생활을 할 뿐입니다.

 

 

애굽 초기 상태의 사람을 억지로 교회에 끌고 오면 어떻게 될까요? 그 교회가 아무리 성령이 역사하는 교회이고 진리의 메시지를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본인에게는 짜증이 날 뿐입니다. 다들 미친 사람들 같고, 왜 저렇게 광신적으로 하나님을 찾는 건지 그저 한심스럽게 보일 따름이고, 교회의 행사나 설교에 무엇인가 즐겁거나 재미있는 것이 있으면 그런데나 조금 관심이 생기고.. 그럴 것입니다. 교회나 예배는 재미가 없어도 또래 친구들이 있어서 즐겁게 지낼 수 있다면 이들은 교회에 열심히 소속되어 활동할 것입니다. 물론 이런 상태는 거듭남과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영혼의 구원사역에 있어서 참으로 성령의 역사를 방해하는 것이 사람의 방법과 열심입니다. 아직 익을 때가 되지 않은 과실을 억지로 흔들어서 따는 것은 과실을 죽일 뿐입니다. 오늘날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사람을 교회 건물로 데리고 오려는 시도로 인하여 교회 안에 많은 불신자들, 거듭나지 않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거듭나지 않은 많은 설교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교회 안에 온갖 세상에 속한 것들이 들어오게 합니다. 그렇게 교회 안에 인간적인 요소, 세상적인 요소, 세상의 영들이 가득해지면, 그들은 부흥이 되었다고 좋아할지 모르지만 성령께서는 그곳을 떠나시게 됩니다.

 

그러면 교회는 영적 생명을 잃고 정치적인 단체나 사교적인 단체나 사회적인 단체로 전락하게 됩니다. 나는 이러한 상태의 교회들이 오늘날 적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어떤 사역자가 주님께서 풍랑을 잠잠케 하신 사건을 이야기하면서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저편으로 건너가자! 여러분.. 신앙은 저편으로 건너는 것입니다! 저편을 향한 꿈을 꾸는 것입니다! 여기에 머물러 있지 마십시오! 위대한 꿈을 가지십시오!]

 

이런 식의 설교를 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는데, 이것은 거듭난 사람이라면 하기 어려운 설교입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것을 가르치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인용하고 싶은 한 구절을 따내어서 자기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는 것은 설교가 아닙니다. 거듭난 사람이면 할 수 없는 이야기를 하는 설교들이 오늘날 참 많이 있습니다.

 

 

애굽 초기의 사람들은 영적인 것에 대해서 아무 관심이 없습니다. 그들의 관심은 오직 세상뿐입니다. 자아뿐입니다. 자기 성공과 편안한 삶만이 목표입니다. 그런데 세상에서 잘 나가고 잘되니 겉사람은 충만한 상태이므로 속사람이 깨어날 수가 없습니다.

 

이런 상태의 사람을 열심히 강압해서 교회에 끌고 오는 것은 그 영혼 자체의 성장을 방해해서 구원의 길을 멀어지게 할 뿐 아니라 모든 이들에게 민폐가 됩니다. 오늘날 분별없는 사역, 성령의 역사와 인도가 아닌 사람의 열정이 얼마나 영혼을 억압하고 깨어남을 방해하는지 모릅니다.

애굽 초기의 사람들은 아직 구원의 때가 아닙니다. 이들의 자아는 높고 당당합니다. 이들은 자신이 대단한 존재이며 자신의 의견이 진리라고 생각합니다. 이들은 모든 것을 쉽게 판단하고 결정합니다. 이들은 아주 높은 상태이기 때문에 주님이 그들에게 가실 수 없습니다.

 

주님은 마음이 상하고 자기 한계를 발견하고 낮은 마음이 되기 전까지 그들에게 가까이 가시지 않습니다. 이들은 자기 나름의 판단에 의해서 종교를 가지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할 수도 있고, 성경을 통해서 인생의 지혜를 공부해보자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아직 거듭남에는 아주 먼 거리에 있습니다. 환경은 평탄하며, 마음이 아직 높기 때문입니다.

 

아직 이들에게 바로는 은혜를 베풀고 있습니다. 이들은 아직 바로에게 속해 있습니다. 이들은 자신을 왕으로 여김으로, 자기에게 잘해주지 않으면 온갖 상처를 받습니다. 이들은 왕의 자리에서 내려오고 싶은 마음이 없습니다. 이들에게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주님은 그들을 사랑하시지만, 그러나 가까이 가실 수 없습니다. 주님은 상한 심령의 사람에게 다가가실 뿐입니다.

 

 

애굽 중반기에 가면 바로가 이스라엘 백성을 괴롭히기 시작합니다. 이때부터 서서히 인생의 즐거움이 사라져가고 힘들어져가게 됩니다. 이 괴로움의 형태는 사업이 부도가 난다든가, 하는 식으로 경제적인 형태로 나타날 수도 있으며 심각한 병에 걸린다든가, 하는 식으로 질병의 형태로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믿었던 관계가 깨어지면서 생기는 상처와 회의의 형태로 오기도 합니다.

이렇게 다양한 형태의 고통을 통해서 이때부터 겉껍질이 서서히 약해지기 때문에 병아리가 껍질을 깨고 나올 수 있는 여건이 조금씩 조성되기 시작합니다. 자신감과 당당함이 조금씩 무너져가고 신앙에 대해서 전할 때 화내고 귀찮아하던 사람이 가끔 조금씩 솔깃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아직 구원의 때가 무르익은 것은 아닙니다. 이 상태에서 교회에 오는 사람도 많습니다. 교회에 와서 기도도 배우고 말씀도 배웁니다. 그러나 아직도 여전히 세상으로 가득하고, 세상의 고통에서 이길 수 있는 힘을 얻고 싶을 뿐입니다. 힘들 때는 기도도 하고 성경도 읽지만, 아직 주님을 인격적으로 알고 경험하지는 못합니다.

 

 

애굽 중반기의 끝이 가까워지면 이스라엘 백성은 힘들고 지쳐서 죽을 지경이 됩니다. 그래서 부르짖기 시작합니다. 세상사는 것이 너무 힘들고 지치고 곤고해집니다. 삶이 허무하고 비참하고 죽고만 싶을 뿐입니다. 얼마나 외롭고 외로운지 가슴이 텅빈 것 같은, 허전함으로 몸부림치고 괴로워하게 됩니다. 사람들의 사소한 말 한마디가 가슴에 깊이 박히고 사는 것이 싫어집니다. 작은 실패에도 죽고 싶을 정도로 괴롭고 힘이 듭니다. 이때에 이르러 하나님께서는 그 눈물과 한숨과 탄식과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구원의 역사를 시작하십니다.

 

 

애굽 후반기에 이르러 하나님은 구원의 역사를 시작하십니다. 사람이 인생에 대해서 회의가 오고 절망이 오고 한계가 올 때, 이 때 겉껍질이 아주 부드러워진 상태입니다. 그 껍질이 조금씩 금이 가고 마침내 속에서 병아리가 깨어나는 것이 거듭남입니다.

이 애굽 후반기의 상태.. 이 상태는 개인마다 차이가 있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세상에 소망이 없고 많은 어려움을 겪으면서 쉽게 이 상태에 이른 사람들이 있습니다. 미움 받고 왕따 당하고 학대당하고 몸도 약하고, 여러 여건들이 바로에게 별로 환대를 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세상이 알아주지 않지만 하늘에서는 알아주는 사람들입니다. 반면에 태어날 때부터 편안하고 좋은 여건 속에서 사랑받고, 인정받고.. 삶이 마냥 행복한 이들은 애굽 후반기에 이르기까지 갈길이 멉니다. 이들의 행복은 하나님 안에서의 행복이 아니고 바로 아래서의 행복이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바로에게서 받은 모든 호의를 다 토해낼 때까지, 구원의 시기가 오지 않습니다.

 

영적으로 눈이 열릴수록, 세상에서의 평탄한 환경이 결코 축복이 아님을 알게 됩니다. 형통이 반드시 좋은 것이 아님을 알게 됩니다. 고통과 절망과 눈물의 환경이 결코 저주가 아님을 알게 됩니다. 실패와 좌절이 결코 실패가 아닌 것을 보게 됩니다. 그 모든 것은 사랑의 왕, 우주의 왕이 우리에게 가까이 오시기 위한 과정들인 것을 알게 됩니다. 눈이 열릴수록 세상을 보는, 인생을 보는 관점이 새로워지게 됩니다.

 

 

어떤 사람이 애굽 초기의 상태에서 교회에 온다면, 그는 성령이 역사하고 진리가 가득한 집회라고 하더라도, 예배가 단지 지루하고 답답하고 따분할 것입니다. 하지만 신앙에 대해서 많은 경고와 위협을 받는다면, 교회에 안가면 지옥갈 것이라고 생각하고 교회에 올 수는 있습니다. 그는 많은 것을 배우고 듣지만 아무런 결실을 거두지 못하며 어떤 진리를 들어도 새들이 와서 다 먹어치우기 때문에 그에게는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합니다. 그는 그저 재미없고 지겨울 뿐입니다.

 

 

애굽 중기에서 교회에 온다면, 그는 가끔 몇 가지 인상적인 메시지를 받거나 감동을 받거나 눈물을 흘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뿐입니다. 그는 여전히 자기의 삶을 살고 자기의 길을 갈 것입니다.

애굽 후반기에 어떤 사람이 성령이 역사하는 교회에 온다면, 그는 교회에 들어오는 순간부터 눈물이 흐르고 감동을 느끼는 것이 보통입니다. 그는 찬양의 소리를 듣기만 해도 가슴이 뜨거워지고 충격을 받으며 영혼이 약동하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애굽 후반기에서 구원의 역사가 시작됩니다. 그것은 한 순간에 이루어질 수도 있고 점진적으로 이루어질 수도 있습니다. 십자가의 강도와 같이 즉각적으로 구원을 받는 사람도 있습니다. 병상에서 죽어가는 사람에게도, 성령께서는 그렇게 역사하실 것입니다.

 

십자가의 강도나, 병상에서 죽어가는 사람들, 인생의 큰 위기 가운데 있는 사람들은 그만큼 겉껍질이 약해져 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속생명이 눈을 뜨고 깨어나는 데에 유리합니다. 평탄한 여건에서 영혼은 깨어나고 거듭나기 어렵지만, 곤고함 속에서 영혼은 서서히 구원과 각성에 가까와집니다.

 

이 구원의 역사는 10가지 재앙으로 묘사됩니다. 이 재앙들은 성도에게는 탈출의 은총이지만, 바로에게는 멸망과 파괴의 순간입니다. 바로로 표현되는 마귀는 어찌하든지 자기가 포로로 잡은 백성들을 보내지 않으려고 힘쓰지만, 결국 10번째 재앙에 이르러 손을 들고 백성을 내보내게 됩니다.

 

이 10번째 재앙은 어린양의 보혈, 십자가 사건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어떠한 기적과 능력도 바로를 굴복시키지 못하지만, 어린양의 보혈 앞에서 마귀는 더 이상 버틸 수 없습니다.

 

 

구원의 역사는 시작되었으나 아직 10번째까지는 도달하지 않은 이들이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기적과 역사, 간섭을 많이 경험하였지만 아직 10번째, 보혈의 역사는 경험하지 않은 이들이 많이 있습니다. 어떤 이는 하나님의 기적, 살아계심, 도우심을 2번, 3번 경험하였습니다. 그는 아직 구원이 멀리 있습니다. 어떤 이는 애굽 후반기에서 8,9번째의 기적과 은총을 경험하였습니다. 그러나 아직 10번째, 그리스도의 제사의 온전함을 모를 수 있습니다. 

    

이 10가지 기적과 재앙이 우리의 삶에서 똑같이 물리적으로 10번 일어난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이것은 예표적인 숫자입니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주님의 구원역사가 진행된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거듭났다고 오해하기에 가장 쉬운 상태가 애굽후반기의 상태입니다. 그러나 거기는 아직 새로 태어난 상태가 아닙니다.

편의상 애굽 초기를 애굽1기, 중기를 애굽2기, 후기를 애굽3기라고 표현하기로 합시다. 그러면 첫번째 재앙은 애굽 3-1입니다. 9번째 재앙은 애굽3-9 입니다.

 

여기서 애굽 3-1부터 3-9까지는 아직 애굽을 벗어난 상태가 아닙니다. 애굽 3-10번째에 이르러 비로소 어린양의 보혈, 십자가에서의 완전 속죄, 용서, 구원을 이해하게 되고 보게 되고 체험하게 됩니다. 그때로부터 실제적인 애굽탈출이 이루어집니다. 이것이 거듭남입니다.

 

이 상태에 있는 사람들이 왜 자신을 거듭난 것으로 오해를 하는가 하면, 교회나 사역자들로부터 다들 당연히 구원받은 사람으로 여기고 그렇게 배우기도 하지만, 또한 자신도 하나님의 은헤를 많이 체험하기 때문입니다. 애굽3-1에서 3-9까지 나타나는 기적과 역사는 은사나 능력의 형태로 나타나기도 하고, 기도응답의 형태로 나타나기도 하고 신비한 경험이나 초자연적 현상으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이 상태에 있는 사람은 자신을 거듭난 자로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경험들과 십자가 보혈을 경험하고 완전 속죄를 깨닫게 되는 것은 다른 것입니다. 아무리 신비하고 놀라운 경험을 많이 하고 아무리 수많은 종교서적을 읽었다고 해도, 심지어 교회의 잘못과 여러 문제점에 대해서 성경에 입각해서 신날한 비난을 퍼붓는 사람일지라도, 아직 거듭나지 않은 상태에 있을 수 있습니다. 거듭남의 경험은 일반적인 은혜와 다릅니다.

 

거듭남 이전의 경험들이나 은혜의 상태에 대해서 거듭남에 가까운, 해산의 때가 가까운 임신 상태라고 볼 수는 있겠지만, 그러나 십자가의 대사면을 모른다면 태어난 것은 아닙니다.  또한 그다지 눈에 띄는 특별한 영적 경험이 없다고 하더라도 십자가 사역, 복음에 대한 충분한 이해와 경험이 있고 내적인 증거가 있다면 그는 거듭났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한 이들은 의식에 있어서, 삶의 가치에 있어서, 방향에 있어서 분명히 전과 다른 모습을 보이게 됩니다.

 

거듭남이란, 구원이란 애굽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벗어나고 세상의 독에서 세상의 사상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구원받고 애굽의 독이 빠질수록 나타나는 현상은 세상적인 가치관에서 자유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거듭남이 선명할수록, 그동안 세뇌되었던 세상적 사상, 사고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세상의 비전, 성공, 그런 것에 관심이 사라지게 됩니다.

 

사역자들은 목회 성공이나 교회를 커지게 하는 것에 관심이 점점 사라지게 됩니다. 남들이 알아주는 것에 대한 관심이 사라지게 됩니다. 간증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을 드러내는 것도 싫어지며 두려워하게 됩니다.

 

물질적 가치관에서 점점 자유롭게 됩니다. 자녀들을 명문대에 들어가게 하려고 목을 매는 부모들이 그런 증상에서 점점 자유롭게 됩니다. 세상에서 성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말로 세상 사랑과 자기 욕망과 자기 영광을 포장하던 사람들, 남들에게 인정받고 높임받기를 갈망하던 사람들이 점점 그러한 것에서 벗어나 진정 하나님의 뜻을 구하게 됩니다. 그것이 구원이며 구원의 결과물들입니다.   

 

물론 우리의 육체는 현실적으로 아직 완전히 죽은 것이 아니므로 그 육을 처리받는 과정을 광야에서 거치게 되지만, 여행이 길어질수록 육과 자아와 세상의 가치관에서 벗어나게 되고 진정한 천국의 사람으로, 천국의 가치관으로, 천국의 소원으로 점점 사로잡히게 되어가는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신자들이 아직 애굽을 통과하지 않고 있습니다. 아직 많은 이들이 십자가 보혈의 의미를 잘 모르고 경험하지 못합니다. 그런 상태에서 자신을 진정한 신자로 여깁니다. 그것은 마땅히 알 것을 아직 알지 못한 것입니다. 그것은 아직 옛사람에 속한 상태이며 새로 태어난 상태가 아닙니다.

 

흔히 삶에서 어려움이 있으면 그것을 광야체험이라고 여기는데.. 많은 경우, 이들이 경험하고 있는 것은 광야의 경험이 아니라 애굽 중반기나 후반기의 경험입니다. 광야의 경험은 애굽의 경험과 차이가 있는 것이, 광야의 경험을 하면 할수록 그리스도의 실제를 가지게 됩니다. 내적인 생명의 역사를 알게 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내적인 경험은 그리 많이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거듭남의 현상이나 열매에 대해서 잘 모르기 때문에 교회에 열심히 다니면 다 거듭난 것으로 여깁니다. 그러나 외적인 열심과 종교적인 행위와 거듭남은 직접적인 관계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신앙경력과 지위나 신앙적 환경, 여건과 무관합니다.

 

오히려 사람의 관점과는 반대일 수도 있습니다. 흔히 성실하고 신앙이 좋다고 인정받는 이들 가운데 거듭나지 않은 이들이 많이 있을 수 있습니다. 반대로 신앙을 별로 인정받지 못하고 별나다고 핀잔 받는 이들이 거듭났거나 거듭남에 가까울 수 있습니다 여기 저기 교회를 방황하고 심지어 이단에 빠지기도 하는 등.. 헤매는 사람들이 거듭남에 가까울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거듭났거나 거듭남이 가까우면 그는 점점 내적인 감각이생기기 때문에 여러 변화들이 일어나게 되는데, 그 변화들이 일반 신자나 목회자들이 보기에 그리 바람직한 모습은 아닐 수 있기 때문입니다.

생명이 있으면 거기에는 감각이 있습니다. 감각이 일어납니다.

 

남들은 다 멀쩡하게 은혜 받고 신앙생활을 잘하는데, 이 사람은 만족이 안 된다고, 여기 저기 기웃거리기 시작합니다. 사역자 입장에서는 집회에 잘 참석하고 봉사도 성실하게 잘하고.. 그랬으면 좋겠는데 성도의 그런 모습을 보면 눈에 가시처럼 여기게 됩니다.

 

이런 사람은 주위 사람들에게도 찍히고 광신자 취급을 받습니다. 그러니 내적인 생명이 일어나고, 내적인 감각이 생기면 한편으로 주님을 누릴 수 있지만, 동시에 왕따를 당할 수 있고 고독한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아가서에서 술람미 여인이 밤중에 신랑을 찾아 헤맸을 때, 예루살렘 여인들은 그 여인의 열정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술람미 여인은 주님을 연인으로 여기는 신자이며, 예루살렘 여인들은 평범한 신자입니다. 그래서 그녀가 왜 그리 주님을 찾고 남편을 찾고 갈망하고 찾아 헤매는지 이해가 안 가는 것입니다. [너, 종교에 너무 빠진 것 아냐?] 하고 묻는 것입니다.

 

단언하건대, 거듭난 사람이면 주님께 빠지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일주일에 한번 예배를 드리는 것으로 도저히 만족이 되지 않습니다. 좀 더 기도해야 살 수 있고 숨통이 터지는 것 같이 느껴지게 됩니다. 그래서 점점 더 주님께 더 가까이 가고, 그분을 항상 모시고 동행하는 삶을 구하게 됩니다.

 

이처럼 내면의 감각이 생기기 때문에 주님과 상관없는 세상적인 이야기, 설교를 들으면 몹시 고통스럽습니다. 그래서 설교에 은혜를 받을 수 없기 때문에 교만하다는 말을 듣게 됩니다.

나에게도 젊은 시절 그런 경험이 많이 있었습니다. 거듭남을 경험하고, 내적인 실제를 누리게 되면서부터 예배 시간에 기도하는 시간과 찬양을 드리는 시간은 아주 행복한데, 메시지를 듣는 시간은 너무나 고통스러워진.. 그런 경험이 많이 있었던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다 말씀이 좋다고 은혜를 받는데, 나 혼자 고통스러우니 너무나 답답해 미칠 지경이었습니다. 나의 신앙이 뭔가 잘못된 것은 아닌 가 괴로울 때도 많이 있었습니다.

 

 

견디다 못해서 기도원이나 기도굴로 도망가서 주님 앞에 엎드리면, 또 다시 달콤하고 행복한 주의 실제를 누릴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 비로소 내 신앙이 잘못된 것은 아니구나.. 하고 안심하게 되었습니다. 혼자서 성경을 펼치고 있으면 그 말씀들이 너무나 꿀물과 같은데, 왜 이것을 예배 때에 설교로 들을 때는 고통스러운지, 그 때는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내가 사역자에게 찍힌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거듭나고, 영의 감각이 생기면 행복한 일도 있지만 또한 고통스러운 일도 많이 겪게 됩니다.

 

 

애굽의 10번째 재앙, 갈보리 십자가의 보혈 사건, 이 사건이 성경의 중심이고 핵심이며 우주에서 있었던 가장 놀랍고 영광스러운 사건인 것을.. 성경의 모든 이야기가 이 메시지를 중심으로 하고 있다는 영광스러운 계시가 복음의 메시지입니다. 이 하나님의 완전하신 의 앞에 인간의 모든 의는 녹아지고 낮아집니다. 그 은혜 앞에서 기가 막혀서 영혼에 지진이 일어나고 혁명이 일어나는 것이 거듭남의 사건입니다.

 

거듭남, 완전한 죄사함의 사건은 사람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꿉니다. 아직 신자는 어린아이입니다. 그러나 새로운 생명이 시작됩니다. 그는 피의 바다를 건너 광야로 나아갑니다. 그는 아직 아버지의 왕국을 접수할 능력이 부족합니다. 그는 훈련을 위하여 광야로 갑니다.

 

광야에서 하늘의 양식을 경험하고 불기둥과 구름기둥 아래서만 움직이는 것을 배웁니다. 보이지 않는 내적 실제가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을 배우고 훈련합니다. 광야의 후반기에 이르면 아직 가나안에 이르지 않았지만, 2지파 반의 영토를 얻은 것처럼, 삶 속에서 어느 정도 천국의 실체를 경험하게 됩니다.

교회 안에 아직 애굽을 통과하지 않은 이들이 많이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몸은 교회에 있으나 마음은 세상으로 가득합니다. 그들은 애굽 초기의 사람들입니다. 어떤 이들은 급하거나 힘들 때 주를 찾고 기도합니다. 그들은 애굽 중기의 사람들입니다.

 

어떤 이들은 세상에서 절망하고 주를 간절히 찾으며 여러 기적과 은사들을 경험합니다. 그들은 애굽 후반기의 여러 재앙들을 경험하고 있는 중입니다.

그러나 은사자들은 많으나 거듭난 이들은 많지 않습니다. 은사의 경험이란, 외적인 경험이며 거듭남은 내적인 경험입니다. 바깥에서 사람을 만나서 교제하고 식사하는 것이 은사적인 경험이라면, 사람을 집안으로 초대하는 것은 거듭남의 경험입니다. 이것은 좀 더 깊은 경험입니다.

 

 

이 거듭남의 경험이 있을 때, 점점 물질적인 가치관, 자아적인 가치관에서 하늘의 가치관, 주님의 가치관을 갖게 됩니다. 점점 세상의 성공이나 형통, 편안한 삶.. 이런 데에 관심이 없어지게 됩니다. 아직 갈 길이 멀고 광야의 훈련이 이제 시작되었을 뿐이지만, 피의 바다, 홍해를 건너며 마귀를 거기에 수장해버리는 능력과 권세를 얻게 됩니다. 그리고 내적인 역사를 알아가기 시작합니다.

 

 

거듭남은 영광의 경험입니다. 죄사함의 경험, 그리스도 보혈의 완전 속죄, 사면을 이해하고 경험하는 것은 놀라운 축복입니다. 그러나 광야에서 내면의 축복, 훈련을 받는 것은 더 놀랍고 영광스러운 것입니다. 겉사람의 죽음과 함께 내면의 영혼이 경험하는 평강과 환희, 아름다움은 더욱 더 깊고 놀라운 것입니다.

애굽에 속한 사람들은 아직 죄에서의 해방이나 자유가 없습니다. 이 거듭남은 아직 칭의의 상태입니다. 성화는 광야에서 이루어집니다. 애굽의 사람들은 아직 경직되어 있고 거칠고 사납습니다. 애굽의 사람들은 자기의 개성이나 색깔이 선명합니다. 그러나 광야에서 훈련될수록 사람은 점점 더 온유해지고 아름다워집니다.

 

그리고 점점 개인의 특성이 희미해지고 여행이 길어질수록 그리스도의 형상이 나타납니다. 이 두 번째 영역의 훈련과 나아감의 아름다움은 애굽에 속한 사람과 비교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가나안은, 이 예수형상의 확장, 헤븐의 확장입니다. 하늘에서 이루어진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우리 삶의 모든 영역에 이루어지고 확장되는 과정입니다. 환란이 오든 전쟁이 오든 이 아름다움과 거룩함의 향취, 생명의 역사는 계속 증가됩니다.

 

 

성장을 위하여, 내적 훈련을 위하여, 광야에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듭남의 경험과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구원은 행위가 아니고 관계입니다. 신앙이란 행위가 아니고 관계입니다. 열매는 관계에서 옵니다. 신앙이란 주님과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이란 우리가 혼자서 열심히 깨끗하게 잘 사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은 관계입니다. 그것은 결혼생활과 같습니다.

 

어떤 사람이 결혼을 했습니다. 그는 모범적이고 성실하게 삽니다. 그런데 그는 배우자를 무시하고 혼자 깨끗하게 삽니다. 밥도 혼자 먹고, 잠도 혼자 자고 혼자서 움직입니다. 그는 모범적이고 좋은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좋은 배우자는 아닙니다.

신앙은 그와 같습니다. 신앙이란 주를 아는 것입니다.

 

거듭남은 행위나 조건으로 인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구원은 행위가 아니고 관계입니다. 가족이 되는 것은 행위가 아니라 관계를 통해서 됩니다. 결혼을 하거나 그에게서 태어나거나 할 때 가족이 됩니다. 관계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일반 행위와 관계행위는 다릅니다. 공부를 하고 일을 하고 돈을 버는 것은 일반 행위입니다. 어떤 사람과 결혼을 했습니다. 이것은 관계행위입니다.

관계행위는 서로 약속으로 인한 것입니다. 착한 행동을 했다고 결혼하는 것이 아닙니다.

서로 약속을 하면 결혼하게 됩니다.

 

 

관계를 맺는 것은 계약이고 약속입니다. 행위로 인하지 않고 약속으로 인하여 관계가 이루어집니다. 상대방이 프로포즈할 때 그 고백을 믿고 받아주기로 약속하면 관계가 형성됩니다.

십자가는 주님의 프로포즈입니다. 포로포즈이며 대사면의 약속입니다. 그것을 믿고 받아들일 때 관계가 시작됩니다. 

 

주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구약이란 한 마디로 율법과 선지자입니다. 율법과 선지자는 그림자인데, 바로 주님의 그림자입니다. 율법과 선지자, 곧 구약의 메시지는 그리스도이신 주님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직까지 율법을 찾고 선지자와 예언을 찾는 이들이 많아서 참 답답합니다. 온전하신 분이 오셨는데, 왜 아직도 그림자를 붙들고 있는지 답답합니다.

 

주님께서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 물으셨을 때 제자들은 대답하기를 [엘리야, 예레미야, 선지자들 중의 하나..]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들은 엘리야 같은, 하늘에서 불이 내려오게 하는 능력으로 대적들을 소탕하는 선지자를 기대했습니다.

그들의 문제를 해결해주고 원수를 소멸하는 능력자, 선지자들을 그들은 원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들의 기대와 달리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분은 선지자이시고 왕이시지만 먼저 제사장의 직분을 행하고, 제물이 되셔야 했습니다.

 

구원이란, 거듭남이란 주님의 제물되심과 관련된 것입니다. 그분의 제물은 온전한가? 하는 것이 논점입니다. 그분의 제사장직은 온전한가?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구원됩니다. 우리가 잘나고 못나고 기도많이하고 금식하고.. 이런 것은 구원과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구원이란 어린양의 제물이 충분한가, 거기에 달려있는 것입니다. 구약의 모든 제물들은 온전히 사람을 깨끗께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드디어 완전하신 제물이 오셨습니다. 그것을 깨닫고 믿고 관계를 맺을 때 구원과 거듭남의 씨가 뿌려집니다.

주님의 그 제사장직이 완전하며 그 제물이 완전하다고 거듭 강조한 책이 히브리서입니다. 너희들 어설프게 믿으면 지옥간다는 책이 아니라, 주님의 사역은 온전한 것인데, 왜 다른 것을 섞느냐? 하는 경고가 히브리서입니다.

 

그리스도의 제사장직, 제물의 온전함을 배우고 믿고 받아들이는 것이 구원입니다. 그리고 그 피를 힘입어 홍해를 건너 광야에 들어갑니다.

광야에서는 그리스도의 왕권, 주인되심이 이루어지는 과정입니다. 광야에서 훈련될수록, 더 이상 자기 맘대로 사는 것이 허용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는 우리 살의 모든 영역을 다스리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그것이 실질적인 천국입니다.

 

 

구약의 선지자는 삶의 시시콜콜한 것을 경고하고 예언하는 것이 아닙니다. 선지자 메시지의 핵심은 그리스도입니다. 그분의 오심, 사역을 전하는 것이 선지자입니다. 초자연적인 부의 이동.. 이런 이야기를 하는 사역이나 사람이 선지자가 아닙니다. 그러한 것은 세상에 속한 영들이 하는 일입니다. 선지자는 오직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세례요한이 왜 가장 뛰어난 사람으로 인정되는가 하면, 구약의 선지자들처럼 모호하게 전한 것이 아니라 주님 바로 앞에서 직접 그분을 그리스도로 지적했기 때문입니다. 

 

신약시대에도 아직도 선지자와 예언을 좋아하는 이들 보면 참 답답합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이 아무리 위대한 선지자라고 하더라도, 한 사람도 거듭나게 하지 못했고 그 선지자 사역의 중심인 그리스도가 이미 오셨는데, 부활하시고 우리 안에 새 영으로 임하셨는데, 왜 아직도 옛 것을 붙들고 있는지 안타깝습니다. 

 

아직 애굽 단계, 은사적 단계에서는 외적인 사역이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나 거듭난 후에, 주의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시면 우리는 선지자의 메시지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없습니다. 온전하신 분이 우리 안에 거하시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21장에서 빌립의 딸들이 예언하기를 사도바울에게 예루살렘에 들어가면 띠로 결박되고 어려움을 당할 것이라고 경고하였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지 말라고 권하였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거부하면서 나도 안다고, 그 예언도 맞지만, 내가 주의 복음을 위하여 나아가는데, 죽고 사는 게 무슨 상관이냐고 하였습니다. 다른 사람의 예언이나 권면이 아니라 자기 안에서 운행하시는 성령의 감동을 따랐던 것입니다.

 

아직 거듭나지 않고 내면의 영이 깨어나지 않은 이들은 바깥의 말에 영향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거듭나고 그리스도의 영이 내주하시는 이들은 외부의 조언에 대해서 겸손하게 듣고 참고할 수는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자기 안에서 역사하시는 내면의 기름부음을 따라서 살아야 합니다. 내부의 주인을 따라야 합니다. 그것이 신약의 삶입니다. 신약시대에 구약적인 기준을 가지는 것은 안타까운 일입니다.

 

 

구약의 한축인 율법도 마찬가지입니다. 구약의 율법은 지키라고 있는 것이 아니라 죽이기 위해서 있는 것입니다. 율법 아래 입을 막고 쓰러지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 법들은 사람을 절망시키고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입니다. 율법도 선지자와 같이 그리스도를 가리키며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율법은 폐해진 것이 아닙니다. 다만 신약시대에 와서 율법의 성격이 바뀌었습니다.

첫째로 구원을 얻기 위한 방편으로서의 율법은 폐기되었습니다. 그러나 구원을 유지하기 위한, 천국에 속한 사람의 기준으로서의 율법은 존재합니다. 그것은 천국의 성격, 원칙을 보여줍니다.

 

둘째로 율법을 지키는 주체가 바뀌었습니다. 구약에서는 사람들이 자기 스스로의 힘으로 율법을 지키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죄에 빠져 사단의 포로가 되었기 때문에 아무도 율법을 지킬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신약에 이르러 갈보리 십자가의 복음으로 인하여 구원받고 거듭난 사람은 그리스도의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시므로 그 율법을 지키는 능력을 얻게 됩니다.

 

율법을 지키는 주체가 바뀌어서 우리가 율법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내주하시는 그리스도의 영이 율법을 지키며 그 의를 이루어가시게 됩니다.

성령의 생명의 법이 우리 안에서 역사하므로 저절로 율법의 의를 이루어가고 지키게 됩니다. 그래서 죄에서 해방되는 것입니다. 죄를 안 지으려고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죄가 싫어지는 거룩한 성품으로 변화되기 때문에 승리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구약 율법의 목적은 그리스도입니다.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여 그분을 향하게 하고 그분이 우리 안에 오셔서 율법의 의를 이루어가게 하십니다. 구약은 선지자든, 율법이든.. 그 목적은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이며 인도하는 것이며 공급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오시면 모든 것이 완성되기 때문입니다. 

 

구약은 율법과 선지자로 표현되기도 하지만, 여기에 시편까지 덧붙이는 경우도 있습니다. 율법과 선지자와 시편.. 이것은 구약 전체입니다.

율법과 선지자도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이며, 또한 시편도 결국 그리스도를 가리치고 전하는 것입니다. 율법은 그리스도의 의를, 선지자는 그리스도의 진리를, 시편은 그리스도의 마음을 보여줍니다. 사랑과 향취와 아름다움을 보여줍니다. 성경의 모든 것은 오직 그리스도를 가르칩니다.

 

마태복음 17장에 등장하는 변화산의 경험에서,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님과 대화를 나누는 것을 보고 베드로는 깜짝 놀라고 압도되어서 주님께 말하기를 초막 세개를 짓겠다고 합니다. 주님을 위하여, 모세를 위하여, 엘리야를 위하여 짓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의 대답은 선명합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여기에 모세와 엘리야의 이름은 등장하지 않습니다. 베드로의 요청은 거절됩니다. 오직 따를 분은 주님 한분이시라는 것입니다.

 

모세는 율법을, 엘리야는 구약의 선지자를 대표합니다. 이제 주님이, 그림자가 아닌 실체가 오셨으니 너희는 그만을 좇으라고 합니다. 이것이 성경의 답이며 신약시대의 답입니다.

그런데 오늘날에도 많은 이들이 사도를 찾고 선지자를 찾습니다. 이미 예수가 오셨고, 거듭난 사람이면 그의 보내신 성령, 그리스도의 영이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데, 왜 아직도 구약을 찾고 선지자 사도를 찾는지 안타깝습니다.

 

실체가 오면 그림자를 좇을 필요가 없습니다. 각자의 받은 것을 따라 은사를 따라 섬길 수는 있지만 그것들은 특별한 것이 아닙니다. 접대하는 것이나, 섬기는 것이나, 권면하는 것이나.. 다 자기가 받은 것으로 직분을 가지고 일할 수 있지만 어떤 특별한 사역들이 중심적이고 대단한 것은 아닙니다. 신약, 새언약 시대의 주인은 오직 주님이십니다.   

 

 

구원이란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그 시작은 갈보리 십자가에서의 그 위대한 용서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주님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 선언하신 것을 믿어야 합니다. 그것이 구원의 시작입니다.

사죄의 확신, 구원의 확신은 아주 중요합니다. 이것이 없이는 마귀에게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마귀의 정죄로부터 벗어날 길이 없습니다.

 

아직 애굽의 초기에 있는 이들, 세상이 마냥 즐겁고, 주님과 진리에 대해서 별 관심이 없는 이들에게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이들을 위해서는 기도와 기다림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구원을 갈망하고 주님의 나라를 갈망하는 이들이 있다면, 이들에게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믿음, 신뢰, 그분의 완전한 사면을 온전히 받아들여야 새로운 세계가 시작될 수 있습니다.

 

 

주님의 용서와 사랑에는 아무 조건이 없습니다. 사람들은 주님께 사랑받을 조건을 만들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지만 은혜에는 아무 조건이 없습니다. 단순히 믿고 받아들이면 됩니다. 그렇게 관계를 맺고 그 은혜를 받아들이고 그 씨의 열매가 자기 안에서 나타나는 것을 기다리면 됩니다. 만약 한참 기다렸지만 아무런 변화가 없다면, 자기가 깨달은 복음이 맞는 것인지, 다시 확인을 해야 합니다. 임신을 하면 안에서 비록 작은 생명이지만, 분명히 그 새생명의 약동이 있습니다.

 

 

오늘날 구원의 확신에 대한 많은 오해가 있습니다. 분명히 거듭났다고 보기 어려운 이가 구원의 확신을 가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성경 몇 구절 이야기하고 그것으로 아무런 내적인 증거도 없이 구원을 확신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또한 거듭난 증거가 어느 정도 있는 것 같은데도 구원의 확신을 갖지 못한 이들도 있습니다.

 

구원의 확신이 없는 이들 중 대부분은 실제로 거듭나지 않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주님의 놀라우신 역사가 내면에서 일어나고 있는데 그것을 믿지 않는 것은 어려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나에게 아주 따뜻하게 대하시고 아주 친밀하게 말씀하시지만, 어느 순간에 안면을 몰수하고 나를 버리실 것이다.. 그렇게 믿는 것이 더 어려울 것입니다.

 

하지만 거듭남의 증거를 어느 정도라도 가지고 있으면서 계속 불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이들이 있다면, 그것은 몹시 안타까운 일입니다. 당신이, 의도적으로 주님을 거부하고 버리지 않는 한, 주님은 당신을 버리지 않으십니다. 구원을 잃을 수 있다고, 잃어버릴지 모른다고.. 그렇게 조심하면서 불안하게 믿음을 가지고 있는 쪽이 신앙의 유지에 도움이 된다고 여긴다면,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구원은 행위의 문제가 아니고 신분의 문제입니다. 사람은 죄를 지어서 죄인이 아니고 죄인이기 때문에 죄를 짓습니다.

강아지의 소리를 많이 내면 강아지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강아지로 태어나면 강아지소리를 냅니다. 고양이 소리를 많이 훈련하고 연습해서 고양이가 되는 것이 아니라 고양이이기 때문에 고양이의 소리를 내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사람은 의로운 행위를 통해서 의인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의인이니까 의로운 행위를 하게 됩니다. 죄인이 죄를 짓듯이 의인은 의를 행합니다. 그것이 자연스러운 법칙입니다. 생명의 성령의 역사가 아니고 생명의 성령의 법입니다. 법칙이고 원리입니다. 애씀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생명의 역사, 열매가 나타나는 것이 법칙이며 당연하다는 것입니다.

 

행위보다 앞서는 것이 존재입니다. 존재에서 행위가 나오지 행위에서 존재가 나오지 않습니다.

거룩함이란, 깨끗함이란 죄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깨끗한 사람은 세수한 사람, 목욕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구약에서 죄를 씻기 위해서 희생제물을 드렸습니다. 

그러나 그 제물은 완전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행위를 처리했지만, 사람을 처리하지 못했습니다. 존재를 처리하지 못했습니다.

 

신약이 되었고 약속하신 말씀이 이루어졌습니다. 완전한 제물이 오셨습니다. 갈보리 십자가의 제물은 우리의 행위를 처리했을 뿐 아니라 우리의 생명을 처리했습니다. 우리의 존재를 처리했습니다. 우리의 신분을 바꾸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신분이 바뀌어 의인이 되었습니다. 신분이 바뀌고 존재가 바뀌었기 때문에 의로운 행위가 이루어지게 되고, 죄에서의 해방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갈보리 십자가의 완전한 사면을 믿는 것은 신분이 바뀌어 의인이 되었음을 믿는 것입니다. 이것을 믿지 않고 받아들이지 않고, 나는 아직도 죄인이라거나, 언젠가 이 용서와 구원을 다시 잃을 수도 있다고 여긴다면, 그는 구원과 해방에 이르기 어려울 것입니다. 자기의와 행위에 근거하면 우리는 죄인이지만, 그의 은혜와 사면에 근거하면 우리는 의인입니다. 그것을 믿을 때 승리와 변화의 역사가 따라오게 됩니다.   

 

이 신분의 변화를 믿지 않으면, 완전한 용서와 사면을 믿지 않으면, 여전히 죄인이라고 믿고 날마다 회개하는 행위를 통해서 구원을 잃어버리지 않고 유지한다고 믿는다면, 그는 죽을 때 까지 죄 가운데서 비참하게 살게 될 것입니다.

처음에는 깨어있으니 좋은 것 같고, 성결해지는 것 같지만, 점점 사소한 죄로 인하여 근심하게 되고 눌리게 되고 죄책감, 자책에 빠지게 되고 점점 엉망이 되어가게 됩니다. 나중에는 아예 지쳐서 떨어져나가거나 정말 타락할 수 있습니다.

 

구원은 신분의 변화입니다. 신분의 변화를 통하여 행위의 변화가 자연스럽게 따라오게 됩니다.

갈보리 십자가는 우리의 신분을 바꾸며 존재를 바꿉니다. 이것을 믿어야 합니다. 성화와 변화는 점진적으로 이루어지지만 태어남은 순간입니다.

 

그 때가 언제인지는 선명하지 않겠지만, 우리가 이 은혜의 복음에 대해서 분명히 배우고 받아들일 때, 어느 순간 우리는 우리의 영원한 신분이 바뀌었음을 알게 됩니다. 우리의 행위나 상태나 조건이 아니라 그분의 일방적인 은혜에 의해서 신분이 바뀌었음을 알게 됩니다. 우리는 뛰고 춤추고 미치게 됩니다. 우리는 행복해서 가슴이 터질 것 같이 놀라게 됩니다.

 

그리고 그분이 우리를 사로잡아 가는 것을 점점 더 경험하게 됩니다. 처음에는 그 임재가 발목에 그쳤지만, 점점 더 그 물에 사로잡혀서 헤엄을 치지 않으면 갈 수 없음을 알게 됩니다. 그것이 광야의 훈련이며 경험입니다. 다만, 그 영광의 사로잡힘을 위하여, 믿음과 신뢰가 필요하며 이것을 결코 잃어버릴 수 없음을, 구분의 넉넉히 지키심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행위나 상태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분의 은혜와 사역을 통하여 이를 믿음으로 새 신분을 얻었습니다. 우리는 새로 얻은 신분에 합당한 삶, 빛의 자녀들로서 살아가야 합니다.

 

그렇게 살아가지 않으면 우리는 고통스럽게 됩니다. 영적으로는 육이 2천년 십자가에서 죽었지만, 현실적으로는 점진적으로 죽어가는 것이며 서서히 후패해지는 것이어서 아직 살아있습니다. 그래서 자꾸 속사람을 방해하고 악으로 달려가려고 합니다. 그래서 넘어질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잠시 넘어질 수는 있지만 우리는 계속 그렇게 육이 이끌어가는 대로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하면 우리 안에서 거룩하신 영이 탄식하고 아파하시므로 우리는 행복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전쟁을 해 나가며 그 영의 기름을 따라 살아가고 빛 가운데 나아가게 됩니다. 점점 더 많은 승리를 누리게 됩니다.

 

이것은 신분을 획득하기 위하여 선하게 살아가는 것과 다릅니다. 이것은 속사람으로 인하여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승리의 삶입니다. 이것은 구원을 얻기 위하여 애쓰는 삶이 아닙니다. 우리는 한번 얻은 신분을 다시 얻을 필요가 없습니다. 이 신분은 영원히 잃어버려지 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으며 그분은 주신 은총을 거두지 않으십니다.

 

 

신앙의 교리에 대한 많은 의견들이 있고 논쟁들이 있습니다. 나는 인터넷에서 여러 교리들로 끝없이 논쟁하는 글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논쟁은 어떤 결론을 가져올까요? 밤새 고양이와 강아지가 서로 어떤 음식이 맛이 있는 것인가로 논쟁할 때, 답은 있을까요? 그들의 성향은 바뀌지 않습니다. 고양이와 강아지는 자기의 성향은 그대로 있고 다만 목만 쉬게 될 뿐입니다.

 

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의 논쟁은 그것이 시작된 지 200년이 넘었지만, 논쟁은 아직도 계속됩니다. 아마 1000년쯤 더 논쟁하면 답이 나올까요?

구원의 확신에 대한 논쟁들도 많습니다. 이것은 500년쯤 토론하면 답이 나올까요?

논쟁하는 이들은 한쪽에서 성경 귀절을 여러 개 제시하고 해석합니다. 그러면 반대쪽이 그 구절은 그런 뜻이 아니다.. 하고 재해석하며 다른 구절을 제시합니다. 그러면 다시 앞의 사람이 내 말을 잘못 이해했군요, 성경공부를 기본적으로 다시 하라든지, 독해력을 기르라는 식으로 대응하면서 다시 해석에 좀 더 긴 설명을 덧붙입니다.

 

상대방은 다시 누가 할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다는 식으로 대응하며 성경 귀절의 원어라든지, 다른 책이라든지.. 자신에게 유리한 증거를 찾고 제시합니다. 상대의 모순점을 찾아내어서 공격하려고 애쓰기도 합니다. 이런 과정이 계속되면서 차츰 감정싸움이 되고 인신공격이 되고 이단 운운, 마귀, 삯군 목자.. 등등의 언어가 오고 가는 험악한 전쟁이 됩니다. 이것은 흔히 볼 수 있는 일입니다. 

 

논리가 서로 부딪치고 끝없이 평행선을 가는 이유는 서로의 성향, 개인적 경험, 위치나 입장 등이 달라서일 것입니다. 사람의 성향은 서로 다릅니다. 경험도 서로 다릅니다. 어떤 사람이 강력한 경험을 했을 때, 그 경험은 그의 인식에 중요한 영향을 끼칠 것입니다.

 

자기의 경험에 반하는 어떤 해석이 있을 때 그는 상대의 주장을 받아들이기 어려울 것입니다. 어떤 책을 읽고 강력한 도전을 받았다면, 그 내용에 반하는 주장이 싫을 것입니다. 또한 자기의 위치나 입장이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견해를 거절할 때 밥그릇 문제나, 여러 현실적인 문제가 결부되어 있을 때 거기에서 벗어나는 것은 쉽지 않을 것입니다.

나는 구원의 확신에 대한 나의 이야기에 동의하지 않는 이들이 많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그들을 설득하고 싶은 의사가 없습니다. 누구든지, 자기의 의견이 맞다고 확신한다면, 그 확신 가운데 거하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모든 것은 주님이 판단하실 것입니다. 다만 상대방의 확신을 흔들려고 노력할 필요는 없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구원에 대한 견해가 충분하며, 자신이 충만한 삶, 자유한 삶, 죄에서 해방되고 풍성한 승리의 삶을 누리고 있다면, 자기의 신앙의 열매로 만족하고 있다면 그대로 만족하면 됩니다. 만약 자신이 충분함을 누리지 못하고 있다면, 아직 자유함이 부족하다면 그 때는 자신의 견해를 다시 조사해볼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나는 신자들이 구원에 대해서 불안해하고 두려워하는 삶보다는, 다른 사람들에게 그 두려움을 열심히 전파하는 것보다는, 거듭남의 분명한 원리와 이치를 발견하고, 거듭남을 경험하고, 그리스도와 놀라운 교류, 자유와 풍성함을 누리는 삶을 살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 확신이 있을 때 애굽을 넘어서 새로운 영역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완전한 사면에 대한 확신이 있을 때, 그리스도의 제사장 사역에 대한 완전함을 받아들일 때, 새로운 영역의 내적인 세계가 시작됩니다. 더욱 더 놀라운 세계의 여행을 위하여 사죄의 확신, 거듭남의 확신은 필수적인 것입니다.

 

구원을 언제 잃어버릴지 모른다는 불안한 마음의 상태는, 아직 홍해바다를 건넌 것이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그는 아직 원수들에게 많은 것을 약탈당할 수 있는 상태에 머물러 있습니다. 순수한 의도로 그렇게 전하는 이들이 있겠지만, 그것을 받아들이는 이들의 영혼에는 많은 어려움들이 있습니다.

인생은 우리가 창조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지으시고 인간을 지으셨습니다. 그리고 내 팽개친 것이 아니라 계속 관리하시며 인도하십니다. 그 의도와 목적은 사람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더욱 더 온전케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더욱 더 하나님의 사람으로 빚어가시고 그를 예배하고 교제하며 영광의 왕국을 나누어주시기 위한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떠나지 않고 계속 같이 머물며 인도하십니다. 우리 마음대로 사는 인생은 비참하고 불안하며 전혀 행복하지 않은 삶입니다. 그러나 우리를 향하신 그분의 사면과 사랑을 받아들이고 그 은혜 안에서 인도받으며 성장하는 삶은 너무나도 아름답고 행복한 삶입니다.

 

 

나는 지난 주 설교 때에 말했습니다.

[사람이 자기의 길을 계획한다고 해서 그대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길을 인도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자기의 계획, 자기의 길을 포기하고 그분의 인도를 따르는 삶이 얼마나 행복한지 아세요? 그것은 말로 형용할 수가 없습니다. 아름답고, 놀랍고 황홀합니다. 순간 순간, 산다는 것이 황홀하다고 느끼게 됩니다. 건강하든지, 아프든지, 가난하든지, 부하든지, 칭찬을 받든지, 비난을 받든지.. 아무 상관없이 그저 행복하고 행복하고 행복합니다.

 

좋은 부모가 되는 자격이 무엇인지 아세요? 그것은 행복한 부모가 되는 것입니다. 행복한 부모는 기쁨으로 가득해서 자녀들에게 행복과 기쁨을 나누어 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충전되지 않은 부모, 행복하지 않은 부모는 자녀를 제대로 키우기 어렵습니다.

 

우울하고 힘들고 피곤하고 지쳐있는데, 어떻게 그들에게 힘과 위로와 기쁨을 줄 수 있겠습니까? 행복한 부모는 자녀가 잘못해도 짜증을 내지 않습니다. 자녀가 넘어져도 부드럽고 웃으며 위로하고 안아줍니다. 그러나 행복하지 않은 부모는 아이들의 사소한 잘못에 화가 나고 꾸짖고 속이 상하게 됩니다.

 

사역자도 그렇습니다. 사역자가 주님으로 인하여 행복하고 행복하고 또 행복하다면, 그는 성도에게 기쁨과 행복을 공급할 수 있습니다. 행복한 사람이 되십시오. 온 세상은 불행하고 고독하고 비참합니다. 만물을 충만케하시는 분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너무나 슬프고 외롭고 미칠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기쁨의 냄새, 평안의 냄새, 행복의 냄새를 가지고 있는 이들을 찾습니다. 그래서 행복함, 기쁨을 가지고 있는 이들에게는 권위가 있습니다.

기뻐하십시오. 행복하십시오. 주님을 붙들면, 주님 안에 있으면 감옥에서도 잔치하고 죽음 앞에서도 행복합니다. 그분은 빛 자체이시기 때문입니다..]

 

 

주의 인도를 받는 삶은 황홀한 삶입니다. 애굽에서 그분의 완전한 보혈과 용서를 받아들이십시오. 그 확신 속에서 광야에 이르십시오. 그리고 내면의 훈련을 받으십시오. 구름기둥과 불기둥 안에서 움직이는 것을 배우십시오. 가나안 정복을 준비하십시오. 그리고 그 삶이 얼마나 행복하고 행복하고 또 행복한 삶인지.. 누리고 경험하십시오.

 

세상 사람들은 당신을 이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 가진 것도 없고 즐거울 일도 없는데 왜 그리 기뻐하고 행복한지 이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 땅에 속한 사람은 하늘에 속한 기쁨과 만족에 대해서 이해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거부하지 않는 한, 주님은 우리를 버리시지 않습니다.

 

우리를 향하신 그분의 눈길에는 항상 자비와 긍휼이 가득하십니다. 우리의 약함과 넘어짐을 주님은 비난하지 않으시고 불쌍히 여기십니다. 그분은 우리가 원하고 구하는 한, 언제나 우리에게 손을 내밀어주십니다.

 

이 기쁨의 여행에 감사함으로, 사모함으로 나아가십시오. 우리는 앞길을 알 수 없지만, 주님이 그 길을 인도하십니다. 때때로 이해할 수 없는 일도 생기고, 슬프고 낙심되는 일도 있을 수 있지만, 길을 걸어갈수록 우리는 그 실패와 연약함의 의미를 깨닫게 되며 더욱 더 주를 간절히 붙들고 사모하게 됩니다.

 

실제를 누리고 알아갈수록, 우리는 세상에 감추어져 있는 하늘의 만나를 먹고 마시며, 그 놀라운 천국의 환희를 알아가게 될 것입니다.

 

인생은 환희입니다. 영광입니다. 그것은 세상의 복이나 누림 때문이 아니라 주님을 갈망하며, 주의 인도하심 속에서 자신을 굴복시키며 살아갈수록, 주님을 더 깊이, 더 가까이 알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더 가까이 알아갈 수 있기 때문에 인생은 행복입니다. 주님을 아는 것이 복이고 은혜이고 영광입니다.

 

환란이 오든 형통이 있든 그것은 상관이 없습니다. 환란도 형통도 주안에서 가치있고 우리를 더 주님의 소유로 만들어갑니다. 환란속에서 겸손히 굴복하고 인내하고 찬양하며 형통 속에서 형통보다 복보다 더 놀라우신 주님을 붙들며 누리고 나눕니다. 우리는 고난이나 즐거움이나 별로 상관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풍부에도 비천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습니다.

 

태어난 것은 복입니다. 오래 사는 것은 행복입니다. 아직 육체가 살아있을 때만 우리는 성장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후에는 성장이 없습니다. 주님께 더 가까이 나아감이 없습니다. 항아리가 가마솥에서 구워지고 있을 때는 변화가 있지만, 항아리가 완성된 후에는 항아리에 새겨진 문양을 바꿀 수가 없습니다.

 

주님은 애굽에서, 쓰레기더미에서 우리를 이끌어내시고 우리의 옷을 벗기시고 씻으시며 광야의 훈련을 통해서 정화시키시고 마침내 가나안에 입성하게 하시고 거룩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주님의 아름다운 신부로 이끌어가십니다. 천국의 더 깊은 빛을 경험할 수 있도록, 우리를 천국에 합당한 시민으로 만들어가십니다. 주님의 인도하심, 그의 긍휼과 자비와 사랑은 무궁하고 영원합니다.

 

부디 그분의 손안에 굴복하고 이끌림을 받으십시오. 구원과 용서받음의 확신을 가지고 날마다 구름기둥과 불기둥 아래에서 사는 것을 배우십시오. 어린양이 이끄시는 대로 나아가십시오. 우리 안에서 천국은 날마다 증가되며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람, 천국의 향취가 있는 영광의 사람.. 빛의 사람으로 점점 더 나아가게 될 것입니다.

할렐루야..

출처 : 정원목사 독자 모임
글쓴이 : 정원목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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